▲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만약 독자 가운데 위의 여덟 글자의 뜻을 아는 분이 있다면 행복한 가정의 부모라 확신해도 좋을 듯하다. 요즘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이걸 모르면 간첩이란 소릴 들어도 무방(無妨)할 정도로 흔한 표현이라고 하니까.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나는 시팔 나의 길을 간다” 후자에는 쌍시옷이 들어가지만 신문이 공공재임을 감안해 순화(醇化)했음을 밝혀둔다. 한글로 만들어진 사자성어 두 개를 대하면서 느껴지는 소회(所懷)가 몇 가지 있어 적는다.

`복잡한 세상`의 함의는 어린 청춘들의 눈으로 봐도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가 만만찮다는 점이다. 하루가 멀다않고 터져 나오는 각종비리와 추문과 절망과 탄식이 인터넷 포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 성적비관이나 학교폭력 내지 부적응으로 자살하거나 학교를 떠나는 어린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게 용서되는 교육현장에서 어떤 구원도 희망의 빛도 찾지 못하는 것이 어린것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 아닌가.

고등학생들이 뼈 빠지게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다 해도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취업관문 내지 절벽이다. 일자리를 늘리지 않는 대기업의 사내보유금이 사상최고를 기록하는 현실을 지적하는 언론은 많지 않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대학 신입생 가운데 상당수가 입학하자마자 영어학원이나 스펙 쌓기에 몰두한다. 결국 대학은 기업에 종속된 예비 직장인 양성소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사실을 빤히 아는 `고딩`들 아닌가?!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다가 죽어나간 고등학생들 숫자만 250명인 나라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헬조선`담론은 2016년 대한민국의 `지금`과 `여기`를 가장 명쾌하게 투시한다. 미래를 향한 청춘들의 꿈이 완전 실종된 나라에서 선택은 자명(自明)하다. 그것이 `편하게 살자!`는 말로 드러난다. 아무리 힘들게 애쓰고 공들여도 결국 `금수저`와 `흙수저`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린것들은 이미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의 욕설을 동반한 강렬한 구어(口語)는 세태반영의 절정이다. 여담(餘談)이지만, 2013년 타계한 김열규 교수는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2003)에서 욕에 담긴 의미를 살핀다. 그는 욕을 “역사성과 사회성을 갖는 무형(無形)으로서 한국문화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버릴 수 없는 요소!”라고 갈파한다. 어쩌면 흉중에 겹겹이 쌓인 분노와 울분과 설움과 절망을 욕으로 발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정화(淨化)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도 욕의 미덕일지 모른다.

요즘 어린 세대들은 `시발`이나 `시팔` 같은 상스런 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그것은 한국사회에 내재한 폭력성과 조야함의 민낯을 그대로 재연(再演)하는 기제다. 온갖 비속어(卑俗語)와 욕설로 묻혀버린 한국어가 순화되는 날, 그날이 언제 올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게 욕을 해대면서도 우리 어린것들은 `나의 길`을 말한다. 어린 나이에 이미 나의 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선사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무한책임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삶의 깊이와 너비를 아직 온전하게 측량하지도 가늠하지도 못할 나이에 `나의 길`을 운운하는 고등학생들의 처지가 못내 안쓰럽다. 마치 굳은 암석이나 빙하처럼 냉혹한 세상은 등 돌리고 저만치 서 있는데, 아이들은 속수무책 (束手無策) 두 손을 비비고 있는 이 나라 형세가 참으로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하되 청춘들이여, 아직은 희망의 끈을 놓을 때가 아니다! 한줄기 희미한 빛이라도 있거든 그 길로 용감하게 전진할 일이다! 그들을 구원해 주소서, 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