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요즘 언론에 간간이 보도되는 사안(事案) 가운데 하나가 중산층의 붕괴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7년 중산층 비율은 74%였으나, 2016년 10월 기준 69%로 5% 이상 감소했다고 한다.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는 국민의 비율은 47%에 불과하다. 한국의 통계야 고무줄처럼 들쭉날쭉하니 신뢰할 수 없다지만, 50% 아래로 떨어진 중산층 비율은 적잖게 충격적이다.

중산층의 조건을 생각해보면 통계치가 허수(虛數)만은 아닌 듯하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조건은 이렇다.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월 급여 500만원 이상, 배기량 2000cc 이상 중형차, 예금 잔고 1억 이상, 1년에 해외여행 1회 이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질적인 조건이다. 돈에서 시작하여 돈으로 끝나는 것이 한국인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조건이다. 참으로 적나라하게 우악스럽고 거칠며 속악(俗惡)하여 우울하기까지 하다.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을 보자. 외국어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직접 즐기는 운동이 있을 것,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을 것, 자기만의 요리 실력이 있을 것, 공분(公憤)에 참여할 것, 약자를 돕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 등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중산층 기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불법과 불의, 부당함에 저항하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을 중산층의 조건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들 나라 중산층이다.

우리는 아직 1960~70년대 `잘 살아보세!` 하는 구시대 유물의 사유와 인식의 틀에 갇혀 있다. 행복과 성공의 척도(尺度)를 물질적 성취로 판단한다. 이럴진대 사회전체가 돈으로 몰려든다. 한마디로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나라와 궁민(窮民)이 되고 만 것이다. 물적인 욕망의 추구는 그 끝을 알지 못한다. 현대와 같은 대량 소비사회에서 그와 같은 욕망은 영원히 채울 수 없는 `탄탈로스`의 조갈증과 다르지 않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욕망과 타락의 징후는 지난 정권에서 기초가 마련됐다. 유명한 `747전략`으로 권력을 장악한 자들의 슬로건은 “부자 되세요!”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구호 아닌가! 2009년 이후 베스트셀러는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같은 투자전략을 담은 책이었다. 부자가 되려고 너나 할 것 없이 주식과 부동산에 달려들었다. 문제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돈이었고, 돈 없는 사람들은 하나둘 중산층 대열에서 탈락했다.

아직도 한국인들은 돈이 고프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그러다보니 돈 이외의 문제는 부차적이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유럽과 미국의 중산층이 가지고 있는 자기만족이나 여유로운 삶의 미덕과 정의(正義)는 그림자조차 얼씬하지 못한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중고생들마저 10억을 준다면 감옥살이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점입가경 목불인견 (目不忍見) 설상가상이다. 이제 돌아보면서 살 때도 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가난하고 일자리 없고, 비정규직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이웃을 배려하면서 살아갈 때도 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나와 내 가족이 소중하다면, 이웃과 그들의 가족도 그만큼 소중하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논리는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묻고 싶다. 인간다운 염치(廉恥)와 도덕성을 내면에 간직하고 시대와 역사와 인과율(因果律)을 사유해야 하지 않겠는가, 묻고 싶다.

이런 기본적인 덕목이 배제된 중산층의 몰락이라면 나는 동의하겠다. 영혼 없고 불의한 욕망의 화신(化身)이 중산층이라면 그들의 몰락을 쌍수(雙手) 들어 환영하고 싶은 마음이다. 한번쯤 돌아보면 어떨까, 우리가 걸어온 길을! 그리고 잠시 생각해보면 어떨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중산층의 붕괴나 몰락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중산층의 조건을 재정립하는 일이 시급한 2016년 한국사회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