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4명의 미인이 있었다 한다. 침어(浸魚) 서시, 낙안(雁) 왕소군, 폐월(閉月) 초선, 수화(羞花) 양옥환이 그들이다. 경국지색으로 이름난 그들이기에 오왕 부차, 동탁과 여포, 당 현종 등이 그들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트로이 멸망의 씨앗 역시 헬레네의 아름다움에 빠진 파리스의 선택이었으니 어찌하랴?! 왕소군과 관련해서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지은 오언고시의 한 구절만 인구에 회자된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영화 `덕혜옹주`를 보고 나서 찜찜했다.`덕혜옹주`는 남녀의 내밀한 심사 깊은 곳까지 파헤치는데 능기가 있는 허진호 감독 영화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외출`(2005), `호우시절` (2009) 같은 작품목록이 떠오른다. 멜로드라마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가 미모와 연기를 겸비한 손예진과 손잡고 찍은 영화가 `덕혜옹주`다. 고종의 마지막 혈육으로 남은 조선왕조 최후의 옹주 이덕혜(1912~1989) 이야기.

영화는 첫머리에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한다. 비록 작은 글씨지만 사실관계 왜곡이 있음을 밝히고 시작한다. 영화가 충실하게 추적하는 것은 인간 덕혜가 아니라, 조선왕조의 옹주다. 개인사적으로 보면 덕혜옹주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7살 나이에 아버지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1921년 4월부터 일출소학교에 입학해 일본식 교육을 받는다. 덕혜옹주는 1925년 3월 일제의 뜻에 따라 일본유학 길에 오른다.

1929년 어머니인 양귀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녀는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2년 뒤 그녀는 36대 대마도주인 24세의 소 다케유키와 혼인하게 된다. 이것은 당연히 일본 제국주의가 획책한 정략결혼이었다. 1932년에 덕혜옹주는 딸을 순산하지만, 병세는 지속적으로 악화한다. 소 다케유키는 1946년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고, 1955년에 이혼한다. 1962년 귀국이 허락되어 1987년 창덕궁 수강재에서 77년의 생을 마감한다.

옹주의 일대기를 보면 영화에서 다루는 그녀의 삶과 일치점을 찾기 어렵다. 허진호는 어린 시절 덕혜의 남편이자 고종의 부마(駙馬)가 될 뻔했던 김장한을 등장시켜 처음부터 끝까지 덕혜와 관계를 맺도록 한다. 옹주의 일생일대 호위무사로 그려지는 김장한. 감독은 덕혜옹주로 하여금 반일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감동적인 대중연설까지 감행하도록 한다. 패망한 나라의 옹주와 왕자들이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처럼 그려낸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기록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고종의 후예들이 치열하게 망국을 극복하고자 했다면, 1945년 해방정국에서 그들은 대대적으로 환영받았을 것이다. 당시 어느 누구도 왕조의 부활이라든가,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환을 대놓고 주장하지 않았다. 시대변화에 눈감은 채 사멸한 왕조의 뒷자락에 의지해 평생을 살아간 그들을 민초들은 외면한 것이다.

열두 살이면 관람할 수 있는 `덕혜옹주`는 55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런 추세라면 600만 관객도 가능해 보인다. 나이든 관객도 그렇지만, 영상매체에 익숙한 어린것들이 왜곡된 역사를 배울까 저어된다. 저토록 도도하고 자부심에 넘치는 옹주가 일본에 저항했다면 얼마나 가슴 뿌듯하겠는가?! 정말 사실이라면! 하지만 `최종병기 활`(2011)처럼 `덕혜옹주`는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패배한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광개토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정복과 승리가 아니라, 평양성 함락과 조선왕조 패망에서 깨달음을 구해야 한다. 승리한 역사는 도취를 낳고, 패배한 역사는 교훈을 준다.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선생은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再生)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패배하고 능욕당한 역사를 되살려 교훈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크고 빛나는 미래를 준비하는 첫걸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