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언젠가 `동방의 등불`이나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린 나라가 있었다. 국권(國權)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겼지만 아시아의 미래를 밝힐 나라로 지목된 나라. 국민소득 세계 최하위였지만, 이웃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고 살아갔던 민초들의 나라. 불의하고 부당한 권력이나 돈벌이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설 줄 알았던 예의와 염치의 나라. 나와 내 마누라 내 자식뿐 아니라, 이웃과 그의 가족 역시 소중하게 여겼던 인간들의 나라.

언제부턴가 그 나라가 실종됐다. 지도상으로는 있다는데, 실체가 모호하고 형상이 배배틀려 예전 용모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세계유수의 경제 대국이자 `한류`를 수출한다는 문화강국, 큰 나라 대통령이 툭하면 거론하는 성공한 나라 대한민국 얘기다. 먹고 살만해진 나라에는 돈과 권력과 성공이라면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종횡무진 하는 인간들로 가득하다. 가족주의를 뛰어넘는 가축주의와 불고염치가 판치는 나라.

지구 반대쪽 에스파냐에서 상당히 기이한 장면이 포착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동영상. 70세 넘어 보이는 배불뚝이 노인이 운동장 한가운데 서있다. 발렌시아 축구 경기장. 객석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기립하여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다. 외관으로 보아도 노인은 발렌시아 단장도 고위 관계자도 아닌 그저 평범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발렌시아 축구팀 장비관리사 베르나르도 에스파나. 지난 1961년부터 55년 동안 선수들의 유니폼과 축구화를 세탁해왔던 인물. 그를 위한 은퇴식이 축구경기를 앞두고 펼쳐진 것이다. 잠시 화면에서 눈을 떼고 허공을 응시한다. 한낱 저런 노인을 위해 구단 관계자들과 선수들과 코치, 감독이 모두 나와 박수를 치고 있다. 거기에 5만 관중이 합류해 기립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독자 여러분은 이런 은퇴식을 한국에서 보신 적이 있는가?! 55년 동안 빨래하고 운동화 닦은 노인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퇴식을 함께하는 장면을 보셨는가?! 평생 무명으로 살면서 생계를 꾸려온 중늙은이를 위한 소략하되 의미 충만한 자리를 대면하셨는가?!

에스파나의 은퇴식에서 떠올린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다. 누구나 어떤 자리에서건 주어진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때 사회가 베푸는 최소한의 예의.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심심찮게 경제위기를 겪는 에스파냐. 그럼에도 세계최고 수준의 축구리그를 가진 나라. 나는 그날 깨달았다. 어째서 에스파냐가 세계최강의 축구실력을 갖추게 됐는지. 아주 작은 인간을 향한 그들의 배려는 아름답고 눈부신 것이었다.

돌아보시라, 대한민국을! 아침저녁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허다한 갑들의 행악질을 우리는 목도한다. 너무 자주 너무도 익숙하게 전달되는 가진 자들의 부도덕과 불의와 비정상이 횡행하는 나라.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그 부모를 죽이는 황음무도(荒淫無道)한 나라.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허용되고 모든 것이 가능한 물신(物神)의 나라.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염치도 예의도 던져버린 천둥벌거숭이들의 나라 대한민국.

이런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상하지 않다.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엽기적인 사건사고가 빈발해도 무감각해진 사람들. 가진 자들의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가 횡행해도 그것을 제지할 아무 수단도 방법도 없는 나라. 젊은이들이 `헬조선`을 말하면 그것을 나무라는 몰염치한 노인들의 나라.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다. 임계점을 가리키는 시계소리 들린다. 폭발하기 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창밖에 태풍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