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br /><br />논설위원
▲ 안재휘 논설위원

미국 `히스토리 뉴스 네트워크`의 설립자이자 편집자인 리처드 솅크먼(Richard Shenkman)은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국민은 어리석다`고 용감하게 단정한다. 그는 국민들의 어리석음 첫 번째 특징으로 뉴스에 나오는 주요 사건들을 모르고, 우리 정부가 어떻게 기능하고 누가 책임을 지고 있는지를 모르는 `완전한 무지`를 꼽는다. 두 번째는 중요한 사건에 관한 정보를 찾는 일에 소홀한 `태만`을 지적한다.

세 번째는 사실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는 `우둔함`, 네 번째는 상호 배타적이거나 국가의 장기적 이익에 반하는 공공 정책을 지지하는 `근시안적 사고`를 든다. 다섯 번째는 의미 없는 문구·고정관념·비합리적 편향·희망과 두려움을 이용하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진단과 해법 등에 쉽게 흔들리는 `멍청함`을 언급한다. 미국 이야기라지만, 우리에게도 너무 아프게 와 닿는 대목이다.

새누리당에서 호남출신 대표가 뽑힌데 이어,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영남출신의 여성 대표가 탄생했다. 이같은 결과가 `영남은 보수` `호남은 진보`라는 해묵은 한계가 극복되는 계기로 작동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이런 반전에서 우리 유권자들의 판단 출발점이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는 조짐을 읽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내년 말 대선을 앞두고 출렁거릴 정치판에 주요한 변인(變因)이 생긴 것은 맞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 안팎에서는 `중도 빅 텐트(Big tent)`설(說)이 확산일로에 있다. 새누리당 지도부를 친박계(친 박근혜계)가 장악한 데 이어 더민주당 지도부 역시 친문계(친 문재인계)가 싹쓸이함으로써 외견상 양대 정당의 이념좌표는 양극화의 길로 뻗어갈 개연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거대 정당들의 비주류가 함께 위축된 구도에서 `중도 빅 텐트` 탄생 예측은 일단 무리한 상상이 아니다.

국민의당이 바빠졌다.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광폭의 행보를 보이면서 외연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안철수 의원은 광주 무등산에서 차기 대통령 선거 출사표를 던졌다. 친박계가 장악한 새누리당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대선후보로 옹립할 가능성이 높고,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문재인 대망론을 잠재울 변수가 전무하다. 여타 대권잠룡들에게 거대 정당들이 일찌감치 문을 닫아 걸어버린 형국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새누리당과 더민주당 양당의 전당대회 결과가 `중도 빅 텐트`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요인이 됐다. 이제 영남에서 보수정당만 바라보지 않아도, 호남에서 진보정당만 밀어주지 않아도 되는 정치 환경이 형성된 것이다. 때마침 지난 총선에서 호남민심을 석권한 국민의당이 있다. 거기에다가 장구한 세월 양극화 정치 파열음에 신물이 난 국민들도 크게 늘어나 있다.

하지만 정치는 고도의 종합예술이다. `빅 텐트` 전략은 결코 특정 정치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새누리당이나 더민주당도 선거를 앞두고 `빅 텐트`전략을 맹렬히 구사할 것이다.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를 갈구하는 중도 유권자들을 향해 끈질기게 구애의 손길을 뻗칠 것이 분명하다. `중도 빅 텐트`를 꿈꾸는 제3정치세력의 성패여부는 이를 극복해내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들이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진정한 자존심을 지켜낼 것인가 아닌가가 핵심변수다. 일찍이 존 듀이(John Dewey)는 “영화관에 가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드라이브를 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국민들은 정치에 점점 흥미를 잃을 것이고, 그 결과 국민들은 점점 더 조종하기 쉬운 대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개헌론`이라는 불쏘시개까지 어질더분하게 굴러다니는 정치판에서 `빅 텐트` 전쟁은 바야흐로 본격화할 것이다. 리처드 솅크먼의 `국민은 어리석다`는 단언이 부디 우리 정치에서는 완전한 오판이 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