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삼국시대 백제에는 박사제도가 있었다. 학위가 아니고 벼슬이름이다. 무엇 하나 전문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내린 벼슬인데, 그 중에서 기와 잘 만드는 사람을 와박사(瓦博士)라 불렀다. 6세기 후반 백제는 일본에 아스카데라(飛鳥寺)를 지어주면서 와박사 4명을 파견하는데, 그들이 일본 최초의 기와집을 지었다. 와박사들은 일본의 옹기공들에게 `기와제조법`을 가르쳤고 일본 특유의 기와문양을 창조해냈으니 이것이 `날아가는 새`가 상징하는 비조문화.

7세기 중반 백제가 멸망할 때 일본은 대군을 파병하지만 기울어진 대세를 어쩔 수 없었고, 다만 백제의 박사들과 고위층들을 보호해 일본에 데려갔다. 선진문화를 전수해 준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 후에도 일본은 유난히 `흙으로 구운 도자기`에 집착하면서 조선의 도공들을 수시로 데려갔으니,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는 것도 그때 수많은 도공들을 잡아갔기 때문이다. 일본은 1910년 한반도를 접수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대동아공영이라는 과욕을 부리다가 자멸했지만, 그것은 `조선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의 발로가 아닌지. 수많은 약탈문화재가 그것을 증언한다.

인도에서 중국을 경유해서 한반도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불교가 전래됐지만, 지불(持佛)은 삼국시대의 독특한 문화였고, 오히려 중국으로 역수출됐다는 학설이 나오고 있다. `지불`이란 작게 만든 불상으로, 품에 품고 다니다가 신령스러운 곳을 만나면 그 곳에 불상을 올려놓고 예배를 드렸다. 경주 남산에는 바위를 깎아 `지불 올려놓는 자리`를 만든 흔적이 많다. 지불 중에서 `금동일광삼존불`이 대표적인데, 이것은 일본 불상의 모형이 됐고, 중국 산동반도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작아서 가지고 다니기 쉬우니 전파도 빨랐던 모양이다.

동양3국은 이렇게 문화를 주고받으며 `상호 존중`의 관계를 맺었지만, 과욕이 빚은 전쟁이 원한과 증오를 만들어버렸다. `침탈의 역사`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한·중·일 동양삼국중에서 `죄 짓지 않은 나라`는 대한민국 뿐이다.

/서동훈(칼럼니스트)

    서동훈(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