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고등학교와 고려대 정치학과를 나와 7선 국회의원을 지내다가 13대 총선에서 낙선하자 미련 없이 정계를 떠나 반공 관련 사회단체를 이끌었던 소석(素石) 이철승 옹이 94세로 타계했다.

해방 직후 “한국은 독립국가를 꾸려갈 능력이 없으니 유엔이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날 때, 좌익 학생들은 “찬성!”을 외쳤으나, 그는 우익학생들을 이끌며 “반탁!”운동을 펼쳤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이 마음에 들어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시도하자 실망하고 결별했지만, “초대 대통령은 국부로 존중돼야 한다”는 주장은 굽히지 않았다.

소석은 6·25 당시 피란 학생 3천명을 모아 학도의용군을 결성해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 전쟁이 끝난 후 전주에서 민의원에 당선했고, 박정희 정권에는 등을 돌렸지만 안보면에서는 보조를 함께 했다. 지미 카터 당시 미 대통령이 주한 미군 철수를 추진하자 야당 대표로서 미 상·하원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미군 철수는 북한의 적화통일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와 동행했던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우리는 그때 미국 대학교 기숙사에서 쪽잠을 자며 미 의원들을 만나러 다녔다. 이철승 대표는 진영논리를 떠나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자였다”고 술회했다.

2003년 종북좌파들이 `맥아더 동상 철거 시위`를 벌일 때 소석은 인천 자유공원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동상을 지켰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의 적화통일 야욕을 무산시킨 맥아더 장군을 민족반역자로 몰아가는 세력과 이를 방관하는 노무현정권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반공은 그가 평생동안 지킨 신념이었다. “나의 많은 경력 중에서 전국학련 위원장으로 자유민주주의 건설에 기여한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술회했던 그는 “통일이 돼 평양에서 냉면을 먹고, 평창올림픽에 가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나라가 엄중한 이때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에 들었다.

/서동훈(칼럼니스트)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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