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한국은 독립국가를 꾸려갈 능력이 없으니 유엔이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날 때, 좌익 학생들은 “찬성!”을 외쳤으나, 그는 우익학생들을 이끌며 “반탁!”운동을 펼쳤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이 마음에 들어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시도하자 실망하고 결별했지만, “초대 대통령은 국부로 존중돼야 한다”는 주장은 굽히지 않았다.
소석은 6·25 당시 피란 학생 3천명을 모아 학도의용군을 결성해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 전쟁이 끝난 후 전주에서 민의원에 당선했고, 박정희 정권에는 등을 돌렸지만 안보면에서는 보조를 함께 했다. 지미 카터 당시 미 대통령이 주한 미군 철수를 추진하자 야당 대표로서 미 상·하원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미군 철수는 북한의 적화통일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와 동행했던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우리는 그때 미국 대학교 기숙사에서 쪽잠을 자며 미 의원들을 만나러 다녔다. 이철승 대표는 진영논리를 떠나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자였다”고 술회했다.
2003년 종북좌파들이 `맥아더 동상 철거 시위`를 벌일 때 소석은 인천 자유공원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동상을 지켰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의 적화통일 야욕을 무산시킨 맥아더 장군을 민족반역자로 몰아가는 세력과 이를 방관하는 노무현정권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반공은 그가 평생동안 지킨 신념이었다. “나의 많은 경력 중에서 전국학련 위원장으로 자유민주주의 건설에 기여한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술회했던 그는 “통일이 돼 평양에서 냉면을 먹고, 평창올림픽에 가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나라가 엄중한 이때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에 들었다.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