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와 누렁이의 눈빛

▲ 조낭희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아침부터 가을비가 내린다. 문득 운부암 은행나무가 비의 무게를 감당치 못해 서둘러 낙화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진다. 손톱이 빠지는 듯한 아픔을 감내하며 가을을 보낼 나무 한 그루를 떠올리며 빗길을 재촉한다.

언젠가 벽안의 노랑머리 처녀가 보화루에 앉아 계절에 빠져들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동양적인 분위기에 매료된 서양 처녀의 고독은 엄숙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은행나무는 유난히 색이 고왔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도 샛노랗게 물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암자와 은행나무, 젊음의 혼연일치가 빚어내는 환상적인 가을날이었다.

은행나무의 이별가만큼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은 암자를 지키는 노구(拘) 누렁이의 존재다. 손님이 오면 덩치 큰 몸을 이끌고 나와 인사를 건네는 누렁이의 눈빛은 고승처럼 깊고 맑았다. 그와 마주하고 있으면 운부암에서 도를 닦다 입적한 어느 스님을 만나는 것처럼 숙연해진다. 개는 총명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사색을 즐기는 듯한 걸음걸이와 촉촉한 눈빛이 좋아 나는 그를 철학자라 불렀다. 먹는 일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등을 쓰다듬고 속삭여도 꼬리를 함부로 흔들어대거나 눈빛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진중한 그의 눈빛 속으로 은행잎이 마구 떨어지는 날에는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기도 했다. 몇 번의 만남으로 정이 듬뿍 들고 말았다.

은해사에 도착할 무렵 비가 그치고 날이 갠다. 길가에는 낙엽들이 젖은 몸을 말리느라 분주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바싹 마른 참나무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어수선한 가을 숲길만큼 사색하기 좋은 곳이 있을까. 치열하게 살다 묵묵히 사라지는 존재들, 숲은 고결한 성자의 품속처럼 경건하다.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이 겸허함도 좋다.

연지의 한가운데에서 달마대사 석상이 반겨주기가 무섭게, 불이문 너머 보화루가 손짓을 한다. 단청이 벗겨지고 세월의 깊이를 간직한 자연스럽고 운치 있는 암자다. 예로부터 북쪽의 금강산 마하연 선원과 함께 남쪽에서는 최고의 지기를 갖춘 도량으로 이곳을 꼽았다. 은해사(銀海寺)의 산내암자로 711년(성덕왕 10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누하진입식으로 보화루를 통과하면 보물 제 514호인 청동보살좌상을 모신 원통전이 보이고 좌측에는 우의당, 우측에는 운부란야가 마주하고 있다. 운부란야는 경허 스님과 성철 스님을 비롯한 고승들이 수행한 곳으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다투는 소리 없이 조용하다는 뜻을 가진 선원이다.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 형태의 가람 배치가 욕심 없고 기품 있는 선비의 집을 연상시킨다.

비가 온 뒤의 운부암은 더욱 적막하다. 웬일인지 철학자 누렁이조차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 원통전에 들러 108배를 하고 보화루 창가에 앉는다. 은행잎은 여전히 푸른빛이 돌고 햇살은 화사하다. 무언가 허전하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누렁이를 찾아 헤매다 나는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롭기로 했다. 애써 호흡과 명상을 하고, 내 안에도 가을이 깊어가기를 바라면서 준비해 온 시집을 읽는다.

날씨가 흐리다 개기를 반복하는 사이, 나는 운부암의 일부가 된다. 내 안에서 어린 나무가 자라고 바람도 불고 잎이 떨어진다. 안정감 있는 고독과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좋다가도, 더러더러 젊은 날의 방황과 아픔이 그리운 것은 청춘이라는 이름 때문이리라.

갑자기 배가 출출하다. 시집보다 부피가 큰 도시락을 꺼낸다. 김밥 몇 개가 들어가자 운부암이 또 다른 눈빛으로 속삭인다. 일용할 양식에 대해 고민 없이 살 수 있음에 가슴 뭉클하도록 고맙다. 형태도 불분명한, 멀고도 아련한 정신적인 가치를 좇으며 살아왔던 내게 일상의 행복은 당연한 것이거나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 보화루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 보화루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생계의 부담을 묵묵히 짊어진 채 살아가는 남편의 존재가 싸하게 다가온다. 문득 그가 나의 부처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치열하게 도를 행하고 깨달음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전쟁터, 나는 그곳에서 멀찍이 물러나서 자유롭다. 어쩌면 형이하학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가장 형이상학적일 수 있다. 일상을 돌아보니 도(道) 아닌 것이 없다. 좀 더 깊고 그윽한 눈길로 본질을 볼 수 있는 힘이 도를 행하는 지름길인지 모른다.

가슴이 따뜻해져 오는데 다시 보슬비가 내린다. 나무는 처연하게 온몸으로 비를 맞고 나는 가을비에 갇혀 일어설 줄을 모른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부여한 깨달음, 공(空)처럼 청빈한 도와 미천해 보이는 도를 함께 맛본 시간이다.

비가 그치고 산길을 내려오다 운부암 스님을 만났다. 얼마 전 누렁이가 세상을 떠나 은행나무 아래 묻혔다는 소식 앞에서 온 몸에 힘이 빠진다. 우수에 젖은 눈빛이 자꾸만 말을 걸며 따라온다. 젊은 날 안내견이었던 누렁이의 삶에 비해 나의 일상은 허세로 가득 찬 것 같다. 누렁이가 전하려던 말은 무엇일까? 운부암 은행나무가 올해는 유난히 노랗게 타오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