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식 국장석 차장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자신을 구해준 로마의 정치가 카이사르를 칼로 찌른 마르쿠스 브루투스(BC85~42). 그에겐 명분이 있었다. 공화정을 지지했던 그에게 세태를 거슬러 황제가 되려한 카이사르는 `다수의 의지로 합의된 다수의 행복`을 거부한 배신자였다. 조금 넓혀 해석하자면 브루투스는 일찍 깨달은 민주주의의 지지자.

민주주의란 뭔가? 한마디로 개념 정의하기 어렵지만, 정치·경제적으로 탄압받고, 억압당하는 이들의 딱한 형편을 연민의 눈길로 살피고자 하는 시스템에 다름없다. 근대 국가가 생성되기 시작한 이후, 그 나라가 민주주의를 성취하고 있느냐 없느냐는 바로 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 얼마만큼 작동되고 있느냐로 결정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우체국택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우체국택배 배송시스템이 얼마나 `비민주적 제도`로 운영되는지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우체국`이란 이름을 사용해서 얻을 수 있는 공신력은 그대로 활용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하부에서 이용자들에게 택배물품을 전달하는 노동자들의 인권에는 관심이 없는 우정사업본부.

우정사업본부-지방 우정청-지방 우체국이란 공식적인 라인이 아닌, 우체국 물류지원단이라는 산하단체를 만들어 그 단체가 재하청을 수행하는 영세 운송업체와 계약을 맺게함으로써,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불행한 사건`에는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제도적 장치를 만든 `우정사업본부 물류지원단의 행태`.(본지 10월 28일자 1면 보도)

카이사르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탄식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변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타자의 고통과 슬픔을 연민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

효율을 위해 인간적 연민과 공감을 포기한 우정사업본부. 힘없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국가기관이면서도 `최대의 잉여자본 획득`을 지상과제로 하는 사기업 이상으로 하청-재하청을 통한 `극대화된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들은 국민들에게 “우정사업본부, 너마저”라는 지탄을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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