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br /><br />작가·문학지 `ASIA` 발행인
▲ 이대환 작가·문학지 `ASIA` 발행인

가오싱젠(高行健), 이 작가를 한국 독자도 엔간히 알고 있다. 중국인 최초로 200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것이다. 수상작은 1990년 대만에서 출간한 장편소설 `영혼의 산`이었다. 1940년에 태어나 프랑스말 통역을 하며 소설을 써온 그는 1989년 톈안문(天安門) 사태 후 중국정부를 비판하다 “도망쳐야” 했었다.

가오싱젠은 노벨문학상 후광을 한창 누리던 2001년 봄날에 스웨덴 한림원에서 기념강연을 했다. 그의 발언에는 내가 얼른 공감한 것이 있었다. 남의 말에 얼른 공감한다? 이건 생각이 같다는 거다. 그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불행하게도 이제는 작가라는 직업도 상품화되었고, 문학작품 역시 시장(市場)의 규율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졌습니다. …. 오늘날의 문학은 상품화라는 제약에도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억압은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만 판단하는 사회에서 더욱 심해지고 있어요. 스스로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나기로 선택하지 않는 한, 이런 억압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습니다. 설혹 자기만의 소설을 지킨다 하더라도, 그 작가에게는 궁핍을 인내하며 겨우 버티는 삶만 가능할 뿐입니다. 슬프게도 이것이 바로 오늘날 문학이 처한 현실입니다.”

맞다. `진지한 독자`의 수가 나날이 줄어들어 조금밖에 안 되는 사회에서 `진지한 문학` 또는 `진정한 문학`을 감당하기란 “궁핍을 인내하는” 시험과 마찬가지다. `진정한 작가`도 가장(家長)인 바에야 경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아주 오래된 개인적인 일이지만, 1980년 9월 22세(대학 4학년) 때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당선된 나는 선친이 남겨둔 유산(遺産) 총액에 버금갈 상금을 받으며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에 한바탕 이름과 얼굴을 날리고는 즉시 귀향을 택하며 이런 일기를 쓴 적이 있었다.

`변방에 박히자. 세상이 나를 잊어라 하자. 작가정신을 단련해야 한다. 주경야독, 낮에는 직장 나가고 밤과 새벽에는 쓰자. 잊히는 길이 진정한 작가가 되는 길이다.`

가오싱젠은 스웨덴 그 강연에서 세계적인 독서 풍토도 염두에 두었을 테지만, 그때로부터 열서너 해가 더 지난 오늘의 한국사회는 `진정한 작가`의 존재 조건이 더욱 열악해졌다. 그래서 작가들도 대다수가 `어떡하든 한 번 떠서 오래 잘 팔리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휘둘리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욕망에 휘둘리는 그 자리가 `진정한 작가`에게는 `진정한 문학의 무덤`을 파는 자리라는 것인데, 그러한 욕망에 휘둘리고 있다면 그냥 정직하게 `문학 장사꾼`으로 나서야 하고 `문학의 명예나 권위`를 허세 부리듯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스마트폰이 우리에게 스마트한 삶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저마다 하나씩 `사색의 무덤`을 들고 다닌다는 생각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오죽하면 스티브 잡스의 가장 나쁜 공헌은 `문학과 철학의 무덤을 판 것`이라고 격한 억지를 부리겠는가.

`사색의 무덤`이 즐비한 곳은 `사색의 공동묘지`이다. 그것을 다시 전원주택으로 바꿔놓기 위해 누가 개간의 첫 삽을 들고 나가겠는가? 진정한 작가, 진정한 문학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사란 돌고 도는 것이니, 돈벌이와 경박한 놀이에 지친 인간들이 다시 진정한 작가와 진정한 문학을 부르는 날이 오게 돼 있다. 그러나 그날이 언제 온다는 말인가? 이 땅에 몇 안 남은 진정한 작가, 진정한 문학이 그날까지 어떻게 `쓰면서 버텨낼` 것인가? 나는 동지들에게 술을 사주며 말하고 싶다.

“변방이면 더 좋지만, 어디서든 주경야독 하자. 낮에 직장 가고, 밤에 술 줄이고, 새벽에 쓰자.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야만을 어떻게 길들일 것인가. 평화통일의 길은 무엇인가. 통일시대의 인간다운 사회체제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이 진실을 탐구하고 상상하고 괴로워하고, 그러면서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