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br /><br />작가·문학지 `ASIA` 발행인
▲ 이대환 작가·문학지 `ASIA` 발행인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지난 주말에 우리의 눈과 귀를 따갑게 쑤셔댄 뉴스다. “다시”라는 단어를 붙였다면 동아시아 시민들에겐 더 자극적이었다. “다시”야말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일본군국주의가 저질렀던 무자비한 침략전쟁의 기억을 당장 눈앞으로 불러왔을 것이다.

지난 18일 밤, 도쿄 참의원(參議院). 집단자위권 행사 관련 11개 법안에 격렬히 반대하는 시민들이 의사당 바깥을 포위한 가운데 안에는 야당 의원들이 몸으로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었다. 그때 아베 신조는 돌부처의 요지부동을 시늉하듯 점잖게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문득 그의 머릿속에 마치 아이의 실에 꼬리를 묶인 고추잠자리처럼 맴돌고 있을 말들을 떠올렸다. 얼마나 적중했는지 얼마나 빗나갔는지 몰라도, 아베가 자기세뇌의 주문(呪文)을 외듯 이러고 있을 듯했다.

`평화를 애호하는 일본 시민들이여, 전쟁을 겁내는 일본 젊은이들이여, 야당 의원들이여. 세계인이 지켜보는 카메라 앞에서 열렬히 반대해다오. 당신들에겐 그 일이 애국이다. 일본인의 평화애호와 전쟁반대에 대한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홍보이기 때문이다. 법안 통과 뒤에도 반대시위가 이어지겠지만 역시 평화애호의 일본 홍보비용이다. 일본 군대가 언제까지 절름발이여야 하는가? 전쟁이 터져야 비상사태 통치권으로 부랴부랴 해치울 건가? 절대 아니올시다.`

패전 70년의 일본은 세계인의 칭송을 받아 마땅한 공적을 쌓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아베 정권의 반성을 촉구한 학자들의 성명서(퓰리처상 수상자 허버트 빅스, 하버드대학 애즈라 보제르, 시카고대학 브루스 커밍스 등 세계 500여명 학자들이 서명)도 “전후 70년 동안의 일본과 그 이웃나라들 간의 평화를 축하”하고 “일본의 과학에 대한 기여와 다른 나라들에 대한 풍부한 원조와 함께 민주주의, 군대의 통제, 경찰의 절제, 정치적 관용의 역사”를 축하했다. 이것이 `전후 일본`의 한 실상이다.

그렇게 축하 받을 만한 일본 국민은 `집단자위권 11개 법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최근 여론조사에서 50%쯤이 반대하고 20%쯤이 보류하자는 답을 했다고 한다. 만약 그 여론조사가 `일본은 영원히 직접 공격을 받았을 경우에 반격할 수 있는 군대(개별자위권)만 보유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면? 답은 “아니오”가 더 높았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과반수의 국민이 집단자위권 법안을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밀어붙이겠노라 단단히 벼르고 있는 아베의 자민당을 총선(작년 12월)과 지방선거(금년 4월)에서 압도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이 바로 이 유추의 근거다.

한국, 중국,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일본의 집단자위권 법안에 대해 국익과 전략의 차원에서 예민한 촉수를 곤두세우고 저마다 다른 반응을 드러내고 있으나, 일본 내부의 사정만 따로 떼내서 들여다본다면,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거나 절대로 전쟁에 동원되기를 싫어하는 국민을 제외할 경우에 대다수가 `언젠가는 와야 할 것이 드디어 지금 왔구나` 하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한 일본 국민이 시급히 풀어야할 숙제가 있다. 세계 학자들이 촉구한 대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과정은 민주주의를 강하게 만들고 국가들 간의 협력을 증진”시키니 아베 정권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여 “일본, 동아시아 그리고 전 세계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향한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만드는 일이다.

당신들의 집단자위권 반대가 진정한 평화애호의 행동이라면, 전쟁동원의 원초적 불안감을 넘어선 평화의 행동이라면, 행동목표에 즉각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하니, 당신들은 그 힘을 결집해 11개 법안 폐기는 못하더라도 아베 정권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도록 굴복시켜서, 바로 이것으로 집단자위권에 평화담보의 생명력을 불어넣고 아베 정권의 양심과 체면, 그리고 일본의 그것을 살려내야 한다. 이렇게 한국의 한 작가는 응원한다. 다시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