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구름처럼 높고 유연하게

인가를 벗어나 한참을 달려서야 고운사 입구에 닿았다. 잔디밭이 넓은 현대식 전원주택 몇 채가 눈길을 끌 뿐 천년 고찰에 어울릴 법한 사하촌이나 식당도 없다. 산문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한낮의 적막과 싸우며 여름 과일을 팔고 있다.

노송들과 잡목이 어울려 만든 천년의 숲, 그 사이로 매끈한 흙길이 누워 있다. 여름이 짠 푸른 그늘과 고요만이 머무르는 길은 마치 꿈 속에서 본 듯하다. 일주문까지 걷기로 했다.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인다. 아주 느리게 끝도 시작도 없는 곳으로 거슬러 오르는 것도 같다. 이 길은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고운사의 순결한 자존심이다.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는데, 최치원이 여지·여사 대사와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바꾸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당시 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를 가진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고운사,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이 좋다. 그러나 경내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라 약간은 산만하고 어수선하다. 무언가 서먹서먹하고 낯설다. 잠시 호흡에 집중하며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이 무심한 허공, 아득한 억겁의 세월 속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고운사도 심드렁하게 나를 지켜볼 뿐 표정이 없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천천히 경내로 들어서다 연세 지긋한 해설사를 만난 건 행운이다. 애향심인지 불심인지 분간키 어려운 진지한 자세와 해박한 불교지식 앞에서 나의 왜소한 젊음을 발견한다. 다양한 전각을 소개하고 주련을 풀어낼 때마다 잠자던 고운사가 생기를 띠며 질서 있게 깨어난다.

18개의 긴 기둥이 계곡 밑에서부터 거대한 몸체를 떠받치고 있는 가운루는 사찰 중심을 흐르는 계곡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전각이다. 공민왕이 두 번의 내란과 노국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이곳에 와서 만사를 잊고 선인으로 돌아가고파 현판을 남겼다고 한다.

구름 위에 뜬 누각, 구름 같은 필체에 어울리지 않게 판문은 굳게 닫혀 있고 온통 검은 휘장이 쳐져 있다. 휘장을 걷고 가운루에 올라서니 마룻바닥에는 수확한 감자를 말리고 있는 중이다. 누각에 앉아 부용반개형(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 기운을 느껴 보고 싶은데 참으로 어이없다. 불이문과도 같은 가운루를 통과해야 극락전에 이를 수 있도록 설계된 데에는 분명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지금은 계곡을 막아 그 위에 대웅전과 범종각을 지어 옛날의 운치는 느낄 수 없고, 양옆으로 새 길이 생겨 가운루는 제 역할과 가치를 잃고 외로움만 삼킬 뿐이다. 등운산 너머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면 절로 시 한 수 떠오를 법도 한데, 기껏 농작물을 보관하거나 건조시키는 창고로 전락하다니 참으로 애석하다.

가운루를 건너면 계곡을 비켜 앉은 우화루와 만난다. 꽃비가 내린다는 뜻의 불교적 색채를 풍기는 우화루(雨花樓) 현판은 보이질 않고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인 우화루(羽化樓)만 쓸쓸히 실내를 지킨다. 유교, 불교, 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과 어울리는 누각이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눈을 감고 선인들의 향기를 느낀다.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경내에는 여전히 불볕더위가 어슬렁거린다. 하지만 해설사는 시종일관 온화하고 진지하다. 다양한 질문을 통해 만나는 그의 해박함도 부럽지만 훌륭한 인품의 근원이 더 궁금하다. 정년퇴임 후 뒤늦게 불교공부를 시작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불심 가득해 보이던 얼굴, 놀랍게도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예수님만큼이나 부처님과 사찰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가진, 유연하면서도 확고한 삶의 철학이 존경스럽다.

언젠가 들은 고운사의 일화가 생각난다. 오래 전 주지 근일 스님을 프랑스 신부 드봉 주교가 찾아왔다. 드봉 주교는 주지실이 아닌 대웅전 법당부터 찾아가 석가모니 부처님 앞에 큰 절을 올린 후, 예수도 석가도 모두 성인이기에 예를 갖추는 일은 당연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주문 앞, 낡은 선풍기가 삐걱대며 돌아가는 작은 사무실이 가운루 못지않게 멋져 보인다.

 

▲ 조낭희<br /><br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끊임없이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태곳적 운치는 사라졌지만 고운사는 분명 명당의 기운이 서려 있는 천년고찰로 손색이 없다.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을 정도로 유명한 명부전이나 보물 246호인 석조여래좌상, 이끼가 끼고 깨어져 나간 나한전 앞의 삼층 석탑의 아련한 기억들보다 나를 더 감동시키는 건 구름처럼 높고 유연한 의식의 흐름이다.

자연이든 신이든 얼마나 깊이 교섭하느냐가 어떤 신을 믿느냐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본질을 놓치고 편협한 눈으로 세계를 함부로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고운사에 가면 어떤 자로도 잴 수 없는, 생각 없이 살아가는 내가 잠시 부끄러워지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아주 운이 좋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