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하고 배타적인 마음이 부끄러운

하늘은 곧 비를 뿌릴 듯 잔뜩 찌푸리고 있다. 표충사 주차장은 한산하다. 뜻밖의 호젓함을 즐기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홍제교 너머에서 일주문이 반겨준다.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일주문은 편액도 없이 빈 몸으로 서 있다.

애써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일주문이 좋다. 시원스럽게 뻗은 길과 신록이 토해내는 풍요로움 속에서 벗과 함께 걸을 수 있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우리는 천천히 세속적인 잡담을 내려놓고, 유교와 불교 문화가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호국불교의 본산지를 향해 걸어 들어간다.

사기에 의하면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 원효대사가 삼국 통일을 기원하고자 산문을 열고 죽림정사라 하였다. 이후 흥덕왕 4년(829년) 인도의 고승 황면선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할 곳을 동방에서 찾다가 황록산 남쪽에 오색서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3층 석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였다.

당시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약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의 약수를 마시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쾌유되자, 왕이 가람을 크게 부흥시키고 절 이름을 죽림사에서 영정사로 개칭하였다. 근세에 억불정책이 심할 때 사명대사의 위패를 모셔와 표충서원이라 편액하고 표충사(表忠祠)로 눈을 가렸다가 지금은 사당과 사찰이 나란히 공존하는 곳이다.

저만치 표충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누각이 보인다. 경내에 표충서원이 있기 때문에 일반 서원처럼 정문에 3문 누각을 세워 좌우 칸에는 수충루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독특한 것은 수충루를 들어서면서 보이는 가람신을 모신 가람각이다.

가람은 승려들이 사는 사찰 등의 건물을 의미하는데 가람신은 부처와 상관없이 가람을 지켜주는 신으로 토속 신앙에서 보면 가람신이 진짜 절의 주인인 셈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구국의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당 3대사의 진영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사당에 참배를 할 수 있는 것도 기쁨이다. 높다란 계단 위에 악귀를 몰아내고 청정도량임을 뜻하는 사천왕문이 사당(祠堂)과 사원(寺院)의 영역을 구분하며 서 있다. 수충루와 표충사는 유교적 공간이고 사천왕문을 넘으면 불교적 공간이다. 표충사(表忠祠)와 표충사(表忠寺), 불교와 유교가 통합된 한국사찰의 독특한 유연성이 흥미를 끈다.

천왕문을 지나니 수려한 재약산이 그제서야 위용을 드러낸다. 유명한 필봉과 사자봉을 비롯한 여덟 봉우리가 아늑하게 절을 감싸고, 봉우리마다 운무가 걸려 있다. 바람에 일렁이는 푸른 대숲의 서걱거림을 들으며 오래된 배롱나무가 붉디붉은 정념을 토해낸다. 결코 나른하지 않은 표충사의 여름이다.

주법당이 사찰 중심에 서 있는데 반해 이곳은 삼층 석탑 주변으로 흩어진 가람배치가 특이하다. 나는 곧바로 주법당인 대광전으로 향한다. 화려한 단청 옷을 입은 대광전은 추녀가 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네 개의 활주가 팔작지붕을 받치고 있다.

추녀마루에는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잡상이 있으며, 용마루 중앙에는 찰간대가 있다. 덕이 높은 승려가 있음을 표시한다는 찰간대를 바라보며 문득 효봉 스님을 떠올린다.

개화기 때, 평양 복심법원 판사를 하다가 돌연 입산하여 대종사 최고 법계를 불교사에 남기신 마지막 고승이다. 구십 고령으로 선정에 드시면서, 앉은 자세 그대로 예언하신 시각에 입적하신 분, 저절로 두 손을 모으고 머리가 숙여진다. 고승의 일화가 서려 있는 곳이라 그러지 더욱 경건해진다.

대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아닌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협시보살로 봉안돼 있다. 친구와 나는 108배 대신 삼배 후 정좌하고 잠시 마음을 씻기로 했다. 간간이 불자들이 들락거릴 뿐, 법당에서 보내는 침묵의 시간은 평화롭고도 빠르게 흘러간다.

대숲에서 일렁이던 바람이 재약산 허리를 감돌다 활짝 열린 법당 문으로 들어와 땀을 씻어준다. 바람의 손길이 부드럽다. 부처님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는 법당에는 한동안 댓잎 냄새를 품은 바람만이 들락거린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대화로 마음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나란히 법당에 앉아 말없이 서로를 챙겨주는 마음만큼 큰 행복도 없다.

 

▲ 조낭희수필가
▲ 조낭희수필가

대광전에서 나오는 우리를 산영각과 독성각이란 현판을 단 작은 전각이 뒤켠에서 맞는다. 소박한 전각과 오래된 보리수 한 그루, 군데군데 피어난 상사화가 펼쳐내는 풍경이 아름답다. 굳건한 보리수와 달리 상사화의 기도는 애절해 보인다.

잎이 지고난 뒤 꽃대를 밀어올리고 눈물겨운 꽃을 피워보지만 또 흔적 없이 사라질 그리움의 꽃, 그 속에 내가 보인다. 하염없이 절을 찾으면서도 나의 불심은 늘 허전하고 목이 마르다.

유난히 넉넉해 보이는 표충사다. 경건하고 엄숙해지는가 하면 어느 새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함이 밀려들기도 한다. 유교와 불교, 민간신앙까지 한 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사찰을 둘러보노라니, 배타적이고 경계 짓기를 좋아하던 나의 편협함이 부끄러워진다. 그러나 어찌하랴. 나의 아집은 슬프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망각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