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 조낭희 수필가

태풍 `찬홈`의 영향으로 파도가 심상치 않더니 결국 마라도 가는 뱃길이 막히고 말았다. 성당과 교회, 절이 사이좋게 모여 있는 최남단의 섬, 오랫동안 꿈꾸었던 마라도 기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택한 약천사는 고색창연함 대신 키 큰 야자수들과 넓은 잔디밭, 29m의 통층으로 지어진 대적광전이 동양 최대의 사찰임을 자랑한다.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일정에도 없던 하루를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영천 은해사 말사란 점과 잠시 인사를 나눈 도관 스님의 대구 사투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귀포 앞바다와 넓은 정원이 한 눈에 들어오는 방에 짐을 풀고 절을 둘러본다.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과 금산사의 미륵전의 구조를 응용하여 설계된 대적광전 안에는 4.5m의 커다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약사여래불을 모신 굴법당도 유명하지만, 오솔길에서 만나는 좋은 글귀들과 하귤나무가 줄지어 선 정원을 거니는 행복감도 놓칠 수 없다. 이국적인 풍광을 뿜어내는 대사찰이건만 낯설거나 어색하지가 않다.

나한전 법당에 앉아 책 속에서 이 절을 창건하신 혜인 스님을 만났고, 점심 공양 시간에는 수원에서 오신 불자 한 분을 알게 되었다. 시원스런 생김새에 걸맞게 막힘이 없다. 우리는 이내 말문을 트고 시원한 커피집을 찾아 뙤약볕 속을 걸었다. 멀리서 울어대는 파도 소리와 키 큰 야자수의 서걱거림이 멀어져 갈 즈음, 서른 명의 직원을 거느린 커리어우먼인 그녀가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떠나보내고 휴식 차 이곳에 왔다는 걸 알았다.

인생의 대선배 같은 그녀는 나와 동갑이다. 내가 쓴 조그만 양산은 자꾸만 바람에 뒤집어지고, 그녀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 맨 얼굴로 땡볕 속을 걷는다. 비바람 앞에서도 굳건한 뿌리 깊은 나무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고무 슬리퍼 끄는 소리가 타닥타닥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무슨 말인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 나는 몸으로 인생을 체득해 온 그녀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그녀의 인생 노정이나 사업적인 성공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와 사람을 대하는 너그러운 태도가 존경스럽다. 세상사에 달관한 듯한 표정과 초연한 말투에서 나는 조촐한 평화를 느낀다. 간혹 무심코 던지는 말들조차 울림이 되어 남는다.

그녀가 제주의 맛이 느껴지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했다. 도관 스님을 모시고 범섬이 바라보이는 작은 식당에서 늦은 점심과도 같은 이른 저녁을 먹는다. 파도는 범섬을 지나 우리가 앉아 있는 해안까지 밀려들고, 나는 애꿎은 전복만 잘근잘근 씹어 삼킨다. 그녀의 아픔과 공허한 슬픔이 파도에 씻겨지기를 기도할 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전복죽을 그대로 남긴 그녀가 저녁 값을 지불했다. 마음이 아리다.

오랜만에 실컷 바다가 보고 싶다. 우리는 파도가 거칠게 춤을 추는 바닷가 커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다는 울부짖듯 포효하고, 해안가에 떠밀려온 부유물들은 높은 파도의 벽을 넘질 못하고 우물쭈물 그 자리를 맴돈다. 한동안 커피를 마시지 마라는 의사의 지시를 무시한 채 나는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커피향을 느끼며 바다를 응시한다. 모두 말이 없다. 바다가 토해내는 이야기에 저마다 귀를 기울이고 반대편 창에선 그림 같은 한라산이 우리를 들여다본다.

명문 S대를 나와 훌륭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다 뒤늦게 출가한 도관 스님은 가끔씩 시간이 나면 이 커피숍에 앉아 책을 읽는다고 했다. 익숙하고 자연스럽던 일들과의 결별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그저 살아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녀는 모처럼 주어진 여유 속에서도 일에서 얻는 기쁨을 자랑했다. 태풍이 끝날 즈음 그녀의 휴가도 끝나리라. 나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코스를 멋지게 소화해내는 사이클 선수를 떠올린다.

 

약천사의 밤은 더욱 화려하고 웅장하다. 불면의 밤을 보냈다는 그녀는 근처 리조트로 짐을 옮기고 나는 홀로 남았다. 사위는 적막하다. 내 방 불빛만 외로이 서귀포 밤바다를 지킨다. 키 큰 야자수들은 밤새도록 휘청거리며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굳건해 보이는 그녀의 가슴을 밤새 할퀴고 지나갔을 소리들, 덥고 갑갑하면 달려오라던 그녀의 마음을 떠올리며 나는 책을 읽는다.

보슬비가 내리는 새벽예불 시간, 꼭 참석하겠다던 그녀가 보이질 않는다. 예불을 보는 동안 몇 번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없다. 예불이 끝난 후 그녀를 대신해 정성을 다해 108배를 했다.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지만 참으로 편안하다. 스스로에게 빚진 무언가를 갚은 듯한 홀가분함으로 법당을 나서는데, 노스님이 먼저 인사를 건네신다.

“저기 수평선을 보세요.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보이나요?”

우중(雨中)의 바다는 잔뜩 찌푸리고 있다. 아상(我相)의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삼악도(三惡道)의 바다는 깊어만 간다는 지난밤에 읽은 글귀가 떠오른다. 아침 공양을 하고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정류장에서 리무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줄곧 그녀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