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서른 즈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의 노래다. 청춘도 사랑도 잃고 날마다 이별하며 살아가는 서른 초입(初入)의 인생을 한탄하는 노래다. 주도적으로 삶을 시작하는 30대 치고는 적잖게 비관적(悲觀的)이다.

공자는 서른 살에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그는 35세에 노나라의 정변(政變) 때문에 제나라에 잠시 몸을 의탁한다. 제나라 군주였던 경공이 정사(政事)를 묻자, 공자는 주저 없이 “君君臣臣父父子子”라 말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경공의 영혼(靈魂)을 뒤흔든 간명(簡明)한 명구(名句)가 아닐 수 없다.

예수는 나이 서른에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과 3년의 공생애를 통해서 예수는 인류역사에 잊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겨놓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요!” 하고 시작하는`산상수훈`은 기독교신자가 아니어도 모두가 아는 구절이다. 억압받고 학대받는 사람들 편에 서있던 예수의 가르침은 오랜 세월 후에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스물아홉 나이에 아내 야쇼다라 공주와 아들 라훌라를 버리고 야반(夜半)에 궁성(宮城)의 담을 넘는다. 각고(刻苦)의 6년 세월 정진(精進) 끝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는 싯다르타. 그가 들여다본 인간의 일생은 너무나도 비참(悲慘)한 것이었다. 그는 깨달음을 구하는 대중에게 설법(說法)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섭 형제에게 홀연히 들려주는 `우루벨라의 산상수훈`은 가히 압권(壓卷)이다.

성인(聖人)으로 모시는 이들의 인생에서 30대는 정신적으로 풍부하고 의미심장한 시기다. 예수와 석가처럼 중생(衆生)을 제도하거나, 공자처럼 일세를 풍미(風靡)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인문학 열풍이 드센 시기에 이들의 가르침은 금과옥조가 아닐 수 없다. 공자의 사선(死線)을 넘는 철환(轍環)과 싯다르타의 죽음 직전까지 이른 고행(苦行), 예수의 골고다와 책형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들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려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깨달음, 나눔, 공존(共存)과 동행(同行)이다. 평생을 배움으로 일관한 공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명언(名言)을 남긴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과 시험(試驗)을 넘기며 예수는 인류를 위한 위대한 경지에 이른다. 가죽과 뼈가 하나 될 만큼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정진을 거듭하여 고타마 싯다르타는 해탈(解脫)에 도달한다.

그렇게 그들은 중생을 위한 위대한 여정(旅程)에 올랐고, 깨달음에 이른다. 그래서다. 새파란 청춘 30대 성인들이 지나간 고난(苦難)의 길을 돌아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너도나도 하나같이 먹고살기 힘들다고 한다. 아니, 잘 먹고 잘 살기 힘들다고 한다. 우리의 물질문명(物質文明)은 비약적인 발전과 진화(進化)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적(精神的) 진보(進步)와 성찰(省察)은 진척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

모두 힘들고 괴롭고 외로워 죽을 지경(地境)이라고 하소연이다. 나라 안팎이 그러하고, 세대를 불문(不問)하고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속 시원한 출구는 보이지 않고, 대형사고와 정쟁(政爭)으로 민생은 피폐하다 못해 파열 직전이다. 이럴 때, 모든 것이 막히고 혈로(血路)는 보이지 않을 때, 그때 공자와 석가, 예수를 생각하자. 그리고 다시 생각하자. 30대 그들이 도달한 아스라한 높이의 깨달음과 구원의 길을!

나는 김광석을 음유시인이라 부른다. 그에게 문학관 한 자리 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이만큼 지난 세기 90년대 청춘을 위로한 시인은 없었으므로!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우리의 30대도 변했으면 한다. 사랑도 젊음도 중요하고, 이별과 만남도 소중하다. 그러하되 시공간의 현저한 축소가 야기한 세계사적인 변화를 냉철하게 통찰하고 세계를 선도하는 청춘이 되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