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

대구에 23년 넘게 살고 있지만 나는 대구 도심(都心)을 모른다. 서울에서도 23년 넘게 살았지만 서울 도심도 잘 모른다. 원인은 공간지각력 부족과 인산인해(人山人海)를 꺼리는 천성(天性) 탓이다.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어디든 간 곳을 기억의 저장고에 입력해 재활용한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아침에 간 길을 저녁에 기억해내지 못한다. 이른바 길치라 한다. 하지만 나는 내비게이션을 거의 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불편하다. 허다한 인총(人叢)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화상을 확인함은 불편한 일이다. 그들의 활기와 소음과 안하무인(眼下無人)에서 울화와 짜증이 이는 것은 나만의 일인가?!

그럼에도 어쩔 도리 없이 도심에 나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대구 도심에 나가는 경우는 영화를 볼 때, 시위(示威)에 동참(同參)할 때 혹은 방송이나 강연(講演)에 참가할 때다. 지난 토요일 23일 오후 2시 무렵 동성로에 나갔다. 서명(書名)을 받기 위해서다. 대구경북의 거점(據點) 국립대 경북대학교 총장 부재사태가 9개월을 넘어섰다. 문제해결을 위해 3월 18일 경북대 민교협이 주최한 토론회가 열렸다. 각계각층(各界各層)의 참가자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한목소리를 냈다. 그 결과 4월 초부터 교수들의 움직임이 생겨났고, 그것은 다시 1만인 서명운동으로 번져갔다.

토요일 하오 동성로는 활기로 넘쳐났다. 가두홍보를 시작한 사학과 교수의 목소리에는 생기와 사명감이 흠씬 묻어났다. 3년 전 이맘때 대구 문화방송 낙하산 사장 반대서명 때 일이 떠올랐다. 제 입맛에 맞는 자들을 동원(動員)해 언론을 장악하고 여론을 주물럭거리는 5년짜리 단임 대통령의 행악질은 군내가 풀풀 나는 것이었다. 어느 경우에도 언로(言路)에 재갈을 물려서는 나라가 온전치 않은 법 아닌가!

우리가 좌판(坐板)을 낸 옆자리에서 시민단체가 `세월호 참사` 관련 서명을 받기 시작한다. 거기서 나는 대구의 살아있는 양심을 본다. 상당수 시민들이 오가는 걸음을 멈추고 `세월호` 서명에 동참하고 있었다. 우리 서명대가 비는 경우가 많았다. 경북대가 대구에서 상실하고 있는 국립대 위상(位相)을 확인하는 것 같아 우울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이런 소모적(消耗的)이고 서글픈 서명 작업이 사라질 것인가?! 지식인을 30년 넘도록 거리로 내모는 나라가 과연 얼마나 정상적인가, 하는 비감(悲感)도 찾아온다. 국립대 총장 자리를 권부(權府)의 입맛에 맞는 사람 앉히려는 권력자 앞잡이들과 거기 편승(便乘)하는 교수들의 행태는 도를 넘은 것이다.

자유와 자율을 빼면 대학에 무엇이 남는가?! 대학에 허여(許與)된 학문의 자유와 지배구조의 자율성을 권부와 권력자가 앗아가면 어찌 되는가?! 특정인의 홍은(鴻恩)을 기대하는 교수들의 과잉충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청와대 5년 세입자를 향한 단심가(丹心歌)가 시대정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인가?!

“천하에 도가 없으면 몸을 숨기고,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간다!” 공자는 그렇게 후학(後學)을 가르쳤지만, 춘추말기의 무도(無道)하고 혼란한 지경에 13년 가까운 세월 철환(轍環)으로 일관한다. 그는 등용(登用)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그 길만이 천하를 구원하는 방도라고 생각했다. 아니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유일한 선택지였던 것이다. 우리는 “길이 다르면 함께할 수 없다!”는 말도 이해한다.

네 시간 남짓한 시간에 440명 정도 서명을 받았다. 서명한 분들에게 우리가 준비한 탄원서(歎願書)와 온라인 서명 안내장(案內狀)을 내주었다. 경북대와 여타 곳곳에서 우리가 받은 서명자가 1만 명을 넘어섰다. 그것을 들고 교육부와 국회를 방문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 경북대 총장 부재상황을 극복하는 방안(方案)을 모색하려고 한다. 대한민국 대표 국립대 경북대학교에 여러분의 성원(聲援)과 관심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