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通路)는 시각이다. 그 다음이 청각과 후각, 촉각 순서라고 한다.“눈이 보배”라거나,“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은 근거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얼굴이나, 눈과 코, 귀를 보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등도 볼 수 없다.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지독한 역설(逆說)이다. 외물(外物)을 보는데 가장 종요로운 눈이 자신을 보는 데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란 얘기다.

여기서 `거울`의 쓸모가 생겨난다.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얼굴과 몸을 인식한다. 나르키소스처럼 거울이 아니라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미치광이가 된 자도 있다. 그러하되 고정된 상(像)을 안정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눈은 거울과 비교(比較)할 수 없다.

시대를 선구적(先驅的)으로 살았던 이상은 `거울`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구료마는/ 거울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거울` 3연)

앞 연(聯)에서 시인은 이미 거울 속의 절대고요와 상반(相反)되게 맺히는 상에 대해 적시(摘示)한다. 소리도 없고, 시인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귀도 두 개나 있으며, 왼손잡이인 거울 속의 시인! 거울에 내재한 모순(矛盾)과 대립의 상황을 날카롭게 꼬집은 `거울`. 하지만 뒤이어 시인은 거울의 미덕을 낮은 목소리로 예찬(禮讚)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감촉(感觸)하지는 못하지만, 거울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자아의 모습 확인에 고마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설령 완전한 상은 아니지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거울에게 시인은 적잖은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잠시, 시인은 극적(劇的)인 반전(反轉)을 결말처럼 제시한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거울`마지막 행)

시인이 거울의 도움을 받아서 만나고 있는 시적(詩的) 자아는 병들고 근심 많은 사람이다. 문제는 거울 속에 있는 그 사람을 근심해줄 수도 없고, 진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거울 속의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분명 동일인이고, 단 한 사람이다. 하지만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안의 나는 어떤 소통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차폐(遮蔽)되어 있다.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대화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듣지 않거나, 자기 견해만 끝끝내 관철(貫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가슴을 시멘트 콘크리트로 발라버리고, 머릿속은 아스팔트로 도배(塗褙)한 사람들과 대화한다는 것은 영혼이 죽어버린 사물과 말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생명이 완전히 연소되어 설화석고(雪花石膏) 마냥 `물화(物化)된` 인간과 대화해야 한다는 것은 고문 이상이다. 문제는 그런 자들이 인간다운 영혼과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지배하는 끔찍한 세상이다.

그런 자들의 양산(量産)과 지배집단의 근저에 깔린 것은 이상이 `거울`에서 말한 것처럼 반성적 자아성찰과 대상인식의 결여다.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바깥의 내가 왜 어떻게 다른지 돌이키는 시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날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인간의 영혼에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와 시멘트와 설화석고가 자리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시라! 21세기 대명천지 대한민국의 지배집단이 보여주는 철면피(鐵面皮)한 무도함과 뻔뻔스러움의 극치를! `세월호 참사` 1년이 지난 지금, 송파구 세 모녀 자살사건이 있은지 1년도 넘은 지금 한국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누구도 부채의식이 없는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사회와 지배집단의 흉물스러움이 새삼 끔찍한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