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다` 이향 지음 문학동네 펴냄, 100쪽

지난 200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새들은 북국으로 날아간다`를 발표하며 시단에 나온 이향 시인의 첫 시집 `희다`(문학동네)가 출간됐다. 11년 전 시인은 “첫 도전에 덜컥 당선이라니. 나는 너무 쉽게 나비가 된 것 아닌가”, “막 첫잠에서 깨어난 애벌레에 불과”한 시인으로서 “말의 집 한 채를 세우기 위해 조급하게 우왕좌왕하지는 않겠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시인이 첫 시집 `희다`를 출간하기까지 걸린 11년의 시간을 두고, 길다거나 짧다고 간단히 평하기는 그래서 쉽지 않다. 다만 “잃어버린 목탑을 세우는 마음으로 한 층 한 층 탑을 쌓아올리고 싶었다”는 시인의 다짐이 `희다`라는 견고한 결실을 맺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수많은 이질적 가치, 현상, 사물들은 이향의 시세계 안에서 화해를 이룬 채 공존한다. “한 층 한 층 탑을 쌓아올리”는 시인의 마음이 반영되어서일까, 대립하고 충돌하고 반목할 법한 언어들이 `희다` 안에서만큼은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나무는 나무에서 걸어나오고

돌은 돌에서 태어난다

뱀은 다시 허물을 껴입고

그늘은 그늘로 돌아온다

깊고 푸른 심연 속에서

흰 그늘을 뿜어올리는

검은

등불

낮에 펼쳐둔 두꺼운 책갈피로 밤이 쌓인다

달의 계단들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다가 다시 펼쳐지는

밤의

정원에서

멀리 걸어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저 혼자 앉아 있는

밤”

─`밤의 그늘` 전문

밤은 이미 태양의 그늘이다. 그렇다면 “밤의 그늘”은 `태양의 그늘의 그늘`인데, 그늘에게도 그늘이 있고 그 “그늘은 그늘로 돌아온다”는 게 시인의 통찰이다.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양경언은 “시인이 그늘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오롯이 그늘이 지탱하는 힘으로 견디어내는 밤에 주목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이르러서야 낮 시간 동안에 존재가 감추어왔던, 조명하지 못했던 이면의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해설)이라고 시인의 `그늘론`을 읽는다. 그늘이 존재의 이면이라면, `그늘에겐 또다른 그늘이 있다`는 게 시인이 발견한, 그 이면의 진실인 셈이다.

“언뜻 보면 한 몸 같아도

죽음을 걷어내면 삶까지 달려나올 것 같아

멀찍이 보고만 선 겨울 배추밭”

─`경계` 부분

해설자의 지적처럼 이향 시의 시적 주체는 “범속한 삶에 매인 여인”에 가깝다. 그러나 시 속의 그 `여인들`은 삶의 범속함 속에서도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모순을 끌어안고 버티는 태도를 견지한다. 이를테면 봄은 단순히 겨울 다음에 위치한 계절이 아니다. 봄은 새것이 헌것을 갈아치우는 교환의 계절이어서 “허물어지는 만큼 피는 봄”인 것이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그늘”(들)이 긴장감 없는 검은색 하나로 묘사되지 않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이향은 `그늘`에서 검은색은 물론 회색, 붉은색, 푸른색, 흰색과 같은 다채로운 색감의 이미지들을 발견한다.

무심히 바라본 그늘은 단조로운 음영(陰影)을 띨 뿐이지만,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고 눈을 감고도 본 그늘은 이전과는 다른, 결코 단순하지마는 않은 그 속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밤의 그늘”을 노래한 시인의 통찰이 우리에게 오랜 사색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이향의 시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을지 모를 풍경에서 풍부한 바림(gradation)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우리의 시각을 넓혀줌은 물론 시력을 한층 돋궈준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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