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문학과 지성사 펴냄 김상환 지음, 607쪽
저자 개인 야심 아닌 시대정신 발로
미래 인문학의 새로운 출발점 될 듯

서울대 철학과 김상환 교수<사진>의 신작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헤겔 만가`(문학과 지성사)가 출간됐다.

`현대의 지성` 시리즈로 출간된 이 책은 서양 철학에 대한 단순 개괄이나 잘 정리된 해설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철학자 김상환의 본격 이론서로, 저자는 이 두툼한 한 권의 책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철학적 세계를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전작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를 통해 동서 사상사를 꿰뚫는 새로운 관점으로 “계사 존재론”을 내세우며 독자적인 철학적 행보를 시작한 김상환의 논의는 이 책에서 한층 더 확장되고 심화됐다.

이와 같이 동서양의 정신을 포괄하는 제3의 정신을 찾는다는 저자의 야심찬 기획은 단순히 자생적 철학을 일구어내겠다는 저자의 개인적 야심이 아닌, 문명사적 요구에 응답하기 위한 시대정신의 발로다.

 

저자는 모든 것이 동요하고 기존의 질서가 뒤얽히며 미증유의 변화를 겪는 이 시대가 인문학이 처한 위기인 동시에 “미래의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출발점”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저자의 귀에 오늘날 인문학자들에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적 요구는 진짜 철학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요구, 다름 아닌 `나는 철학자다`에 참여하라는 요구처럼 들린다. “지식생산의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나 비판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현재의 인문학에서 벗어나, 인문학의 존엄을 직접 증명해 보이라는 요구. 이 책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한 철학자 김상환의 적극적인 응답이다.

그동안 꾸준히 동양과 서양의 사유를 아우르며 양자를 뛰어넘는 새로운 길, 제3의 정신을 모색해온 김상환의 문제의식은 이번 책에서 더욱 깊이와 밀도를 더했다.

동서양의 사유를 상호 번역하는 수준과 그 폭도 변화를 겪었으며, 한편에 플라톤 이래의 서양 전통 철학과 해체론의 흐름이, 다른 한편에는 `주역`에서 발원하는 동양 사상의 전통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짜인 텍스트는 더욱 촘촘해졌으면서도 더욱 넓은 외연을 망라한다.

600여 쪽의 두께에 담긴 밀도 높은 열일곱 편의 글들은 저자의 깊이 모를 사유의 폭과 그 진정성을 짐작케 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인문적 상상력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인간, 언어, 역사 등 인문학의 구심점을 이루는 사태들에 대해 두루 언급하는 한편, 이 사태들을 상호 교차 및 삼투시키면서 새로운 인문주의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가 `헤겔 만가`인 것은 헤겔의 역사적 위치 때문이다. 20세기 후반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탈서양 담론이나 탈근대 담론은 헤겔 철학을 저승으로 보내기 위한 만가였다.

이번에는 우리의 자생적 인문학 담론이 그 상여를 대신 멜 차례가 됐다는 것이 바로 저자의 인식이다. 그것은 “서양의 정신을 절대화하기 위해 동양의 정신을 살해, 애도, 매장했던 장본인”이 바로 헤겔이었으며, 이후 서양의 해체론이 향하는 듯 보이는 철학의 동쪽이 실은 서쪽의 서쪽이었다는 자각에서 비롯됐다.

동서양 사상을 포괄하며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문주의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는 저자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대과(大過)시대`라 명명할 수 있다. 이는 저자가 `주역`에서 끌어낸 시대진단으로 “어떤 안정된 척도로 질서가 조직되는 시대가 아니라 척도 자체가 흔들리고 굴절되는 시대, 위대한 개혁을 기다리는 과도기”의 시대를 일컫는다.

물질적 풍요가 기술적·정신적 풍요로 이어지며 마침내 기존의 제도적 질서를 초과하는 시대로, 다시 말해 “새로운 인문적 교양의 탄생”이 요구되는 시기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문적 상상력의 발원지인 인간의 내면성 혹은 내면적 인간성은 홀로 발아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대타자) 옆에 서야만 비로소 자기 고유의 차원을 획득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인문적 상상력은 “엄마 곁과 같이 세계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가늠할 수 있는 어떤 원초적인 장소를 찾고 또 지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서양 인문주의의 역사적 기원에 있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그런 장소를 고전 문헌에서 찾았으며, 동양 인문주의의 역사 또한 철두철미 고전 주석의 역사였다.

그것은 바로 전승되는 위대한 언어야말로 엄마 곁과 같은 장소, 나아가 인간 일반의 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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