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신객원 논설위원로타리 코리아 차기위원장
산촌의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부지런히 마당을 쓸어놓고 간다. 아침잠이 없는 나이 든 주인이 이를 보고 머슴을 불러 마당쓸이를 한 이웃에게 먹을 양식을 내려 보낸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이 땅에는 이런 풍속이 남아 있었다. 춘궁기를 보내는 이웃이 마당을 쓸어주고 가면 주인은 그 집에 양식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마당쓸이와 같은 생활경제 유통 풍속으로 인해 춘궁기란 절대빈곤 시기가 1960년대 초까지 200여 년간 지속됐으나 요즘처럼 각박하다는 말이 별로 나돌지 않았다.

마당쓸이로 춘궁기를 잘 넘긴 이웃은 그집 애상길일(哀喪吉日)을 월력에 칠해 두고 그날이 오면 메밀묵, 두부, 감주 동이를 날라 보답을 하거나 시키지도 않은 논둑 풀을 베고 김을 매놓고 간다.

이집 저집들은 작은 나눔을 몸으로 보답함으로써 마을은 결속이 된다. 조선 중종시대에 만들어진 향약(鄕約)은 마을에 굶어 죽는 자가 있으면 인간파문(人間破門)에 가까울 치욕으로 제재했다.

집성촌에 굶는 이웃이 있으면 개떡(보리등겨로 만든 떡)을 조각 내 나눠 먹었듯이 우리민족 정신은 남을 돕는 희사정신이 크다.

술 문화는 더 독특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우리 술 문화는 주막과 가정집이 주도해왔다. 명절과 기제사, 농주로 술을 빚어서 마셨고 술을 빌리거나 사와 차례 상에 올릴 생각은 할 수조차 없었다.

1909년 일본인들이 주세법을 만들면서 우리 주막 문화는 바뀌는 것이라기 보다는 아예 없어 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1935년에 펴낸 `조선주조사`를 보면 1916년 조선의 장터나 길목에서 술과 음식을 만들어 팔았던 주막은 12만개가 있었으나 일본인들이 양조장 면허권 제도를 강화, 시행하면서 1919년에는 7만여 군데로, 1925년엔 3만여, 1930년에는 5천 군데로 줄어들어 버렸다.

대한제국 민초들의 술 빚는 솜씨들이 일제의 수탈방법으로 박탈당한 15년 만에 12만개의 주막이 5천 군데로 줄어버렸다. 당시 일제는 양조장에서 술을 팔아 거둬들인 주세가 국세의 30%를 차지, 전비를 충당했다.

그런데 현실은 아직도 음식 만드는 손에 술 빚는 솜씨를 되돌려주지 않고 있다.

엿장수는 언제부터 가위를 썼을까. 19세기 말에 활동한 동양화가 김준근의 그림 `엿 파는 아이`에서 가위를 든 소년 엿장수가 등장한다. 이 그림으로 봐서 19세기 말 이전에 엿가위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애완견의 역사도 이외로 깊다. 이암(1499~?)이 그린 귀여운 강아지 그림이 뒷받침한다. 누렁이 삶는 법 등 개고기 조리법이 나오는 걸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도 여름철 체력을 돋우는 방법으로는 개고기를 최고로 여긴 것 같다.

중종 때 권신이었던 김안로는 알아주는 개고기 마니아. 육질 좋은 개고기를 그에게 올려 벼슬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성리학이 조선시대를 지배했었지만 사랑방에서 은밀하게 즐긴 것은 역시 춘화(春畵)다. 춘화는 당대의 최고 화원이었던 단원과 혜원도 그렸을 만큼 흥미롭다.

남녀의 운우지락(雲雨之)을 실재보다 더 적나라하게 그린 것도 있고 흥미를 불붙이는 극히 야한 묘사로 인해 민간에 퍼지는 그 속도가 공중에 나는 새보다 빨랐다는 속설이 남겼다.

기와 올리기 짚신삼기 공동체풍경도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묶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정겨운 풍속들이 삶의 한 양식으로 자리 잡은 빨리빨리가 쓰나미처럼 쓸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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