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시간 여행, `연오랑 세오녀의 원류 추적-신화속의 SEA-ROAD를 찾아서` 는 두 개의 화두를 두었다. “일본 간 연오랑과 세오녀는 무엇 때문에 갔으며”, “영일만에서 일본의 시마네현으로 연결된 해양 루트는 철의 문명을 전파한 지름길이었나?” 하는 것이었다.

이 생각의 바탕에는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으로 갔다고 표현된 삼국유사에서 아달라왕 4년(서기 157년)이라고 분명히 밝힌 시기와 일본에서 왕이 되었다는 연오랑과 이즈모국을 건국하는 스사노 오미노고토와는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고대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방법은 같은 시대의 인근 역사서, 유적·유물·지명유래, 언어 등의 연구와 고찰들을 통하여 그 문명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프롤로그

경북동해안지역의 소국
일본속에 숨쉬는 역사적 진실⑴
일본속에 숨쉬는 역사적 진실⑵
신화의 고향 이즈모의 유적들
에필로그

삼국유사 기이편의 연오랑 세오녀 조의 내용은 기록상으로 볼 때 연오랑과 세오녀가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이주한 사례가 된다.

대륙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가지고 한반도 남부로 내려온 이주민들은 선주민들과 소국을 만들고 진한(辰韓)연맹을 이룩하여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2세기 중반, 그중에서 철기문명을 흡수하여 가장 먼저 강력해진 사로국(斯盧國)이 신라(新羅)라는 고대국가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사로국의 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은 초기 신라의 정복왕으로 한반도 동남부의 소국들은 물론 가락국의 공격을 물리치고, 발달된 철제무기로 무장하여 소국들을 거의 합병 하였다. 이 초기 정복 활동은 제8대 아달라왕 대에도 계속되어 북으로 조령, 남으로 울산까지 영토를 넓힌다. 이 시기에 경북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근기국(勤耆國)도 사로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던 것이다. 근기국의 고위층은 사로국으로 많이 흡수되었을 것이나 그중에는 일본으로 이주를 선택하였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제련법, 고대 가야 `다타라` 제철 방법

한반도 청동기·철기문화 전래로 소국 형성

일본 서부지역 문명 동해 해상루트와 연관

삼국유사의 글을 보아 연오(延烏)와 세오(細烏)는 사로국에 의해 근기국이 점령당할 시점에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로 이주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세오녀가 비단을 짜고 보유했다는 것은 당시 최첨단 기술을 가진 고위층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두 사람의 이름에 까마귀 오(烏)자를 사용한 것도 마찬가지다. 한반도 고대 사회에서 까마귀는 태양과 하늘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 랑(郞)과 여(女)자는 당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게 붙이는 존칭이어서 연오랑 세오녀 부부는 일반 평민이 아니라 지배층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주한 지역은 일본의 어디였을까?

우리의 동해와 맞닿아 있는 곳 영일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일본의 이즈모에는 이들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유적들이 있었다. 이즈모 다이샤를 비롯하여, 가라카마신사, 히노미키신사, 가라쿠니신사, 이파바시신사, 수좌신사, 한국 이태저신사 등이 그곳이다.

항로와 관련하여 신화에 나오는 돌로 만든 배는 없다. 삼국유사에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는 부분은 신화적인 부분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위나 돌에 항해한 배와 관련된 표현을 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일본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스사노 오미노고트는 돌배(岩船)를 타고 이즈모(出雲)에 도착하였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 이즈모 가라카마신사 입구에는 돌로 된 배 이와부네(岩船)가 있었다. 배의 앞모양처럼 생긴 이 바위는 스사노 오미노고토가 신라국 소시모리에서 바다를 건너 타고온 배라고 전해진다. 스사노가 이즈모에 도착하여 카라사비노쓰루기로 매년 처녀 제물을 잡아먹는 머리가 8개 달린 거대한 뱀(八頭蛇)의 머리를 잘라 죽이고, 족장의 마지막 남은 딸 이나타히메와 혼인하여 이즈모국을 건국 하였다고 한다.

이와함께 이즈모에는 땅이 부족하여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신들이 신라 외 여러 곳에서 땅을 끌어와 땅을 넓힌다는 쿠니비키 신화(國引神話)가 이즈모 풍토기(出雲 風土記)에 기록되어 있다. 땅을 끌어 왔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기는 하나 바위섬을 타고 바다를 건넜다는 것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풍요로운 농경의 시작도 철제 농기구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즉 쿠니비키 신화는 한반도 남부로부터 철기문명인들이 이주해온 것을 뜻하고 있다.

연오랑 세오녀 원류 추적 조사단이 와코 박물관에 갔을 때 일본의 제련법은 고대 가야로부터 전수받은 `다타라` 제철 방법이라고 하였다.

`다타라`는 `모두 타라`는 한국어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도 나와 있다. 또 고진다니(荒神谷)유적에서 1984년에 발견된 358개의 사용하지 않은 아요이 시대(1~3세기)의 청동검(靑桐劍)과 1994년 근처 가모이와쿠라(加茂岩倉)유적에서 출토된 39개의 동탁(銅鐸)은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일본에서 가장 앞선 철기문화 유적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대 이즈모 지역은 이른 시기부터 한반도에서 청동기, 철기문화가 전래되어 강력한 소국(부족국가)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한반도 남부 근기국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최첨단의 철기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들어와 일본 이즈모국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즈모에는 건국 신 스사노 오미노고토가 죽은 곳에 세운 가라쿠니신사(韓國神社)라는 곳까지 있다. 스사노 오미노고토를 모시는 또 다른 가라카마신사도 있다. 일본서기 신대기(神代記)에는 `스사노 오미노고토가 이즈모에 도착하자마자 팔두 사(八頭 蛇)를 죽여 꼬리를 갈라보니 칼 한 자루가 있어 취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선진 철기 문명을 가진 이주민들이 아직도 원시적인 풍속으로 처녀 공양의 제의(祭儀)를 행하던 8개 부족을 정복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들은 영일만에서 해류를 이용하면 가장 쉽게 갈 수 있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즈모까지의 항로가 당시 최첨단 문명이 전파된 철의 루트였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고대 한·일 교역의 메인 루트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이 메인 루트라는 것은 실상 여러 가지 글과 출판물, 언론 매체를 통하여 우리의 관심을 많이 끌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동해가 해상 루트로 이용되었던 것은 무척 오래된 일이었다.

선사시대에 이미 이 항로를 통하여 문명이 전파되었고, 일본의 야요이 시대 이전부터도 알고 있었던 항로였다. 철기시대에는 더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세오가 또 바위를 타고 연오 곁으로 가고, 세오가 짜준 비단을 가지고 사자가 돌아왔다고 삼국유사에 서술된 부분 들은 당시에 교류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을 미루어 볼 때 일본 서부지역 문명의 시작은 해상 루트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시마네현은 야스기의 금속, 이즈모와 마스터(益田)의 방직업이 유명한 곳이다. 연오랑 세오녀의 신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영일현의 옛 이름을 근오지(斤烏支)라고 하였다. 근(斤)이 큰(大)의 이두로서 흔히 쓰이고 있어 `큰 오기`라고 읽을 수 있다. `큰 오기`와 현재 시마네현 이즈모의 오키섬의 발음이 비슷하다. 이 견해는 영일이 오키섬 문명과 관련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삼국유사 10행 237자의 문맥을 가지고 떠났던 역사 속의 시간 여행은 화두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시작된 것이었다.

시간의 덮게 속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던 비밀의 문고리를 이즈모에서 연오랑 세오녀와 관련된다고 보는 살아 숨 쉬는 많은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 연오랑 세오녀의 원류를 찾는 연구 활동은 돛을 올리고 항해를 시작하였다. 이 항해가 닻을 내릴 때까지 이 활동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활발한 연구가 계속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고대에 활발한 교류와 교역의 루트였으나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연오랑 세오녀의 교류 루트부터 새롭게 부활시켜야 할 것이다. <끝>

/이즈모시에서 김용우 포항시사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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