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처 단풍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눈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미당 서정주 시전집 1`(민음사,1991)

오래 전 가수 송창식이 노래로 불러 널리 알려진 서정주의 시`푸르른 날`. 이 시는 미당이 34세에 펴낸 둘째 시집 `귀촉도`(선문사,1948)에 실린 24편의 작품 가운데 하나다.`귀촉도`는 미당이 첫 시집`화사집`(남만서고,1948)에서 보여준 “麝香 薄荷의 뒤안길”로 “병든 수캐만양 헐덕어리며” “石油 먹은듯…石油 먹은듯…가쁜 숨결”이 온전히 극복되고 무한(無限)의 깊은 내면 세계로 이행(移行)하는 그의 시적 도정(道程) 앞머리에 놓여있는 시집이다. 표제시`귀촉도`를 비롯하여`밀어``꽃``견우의 노래``문열어라 정도령아``푸르른 날`등이 예의 그 명편(名篇)들이다. 시`푸르른 날`을 눈으로 읽으면 나도 모르게 자꾸 가락이 솟아난다. 꼭 송창식의 노래 때문만은 아니다. 전체 시행의 4음보 처리, 수미상응(首尾相應)의 구조, 3·4연의 각 1행과 2행이 갖는 대구와 반복이 시의 가락(음악)을 절로 솟구치게 한다. 그리고 “저기 저기 저,”와 “또오면”의 시적 수사(修辭)는 또 어떤가. 삼십대 초반의 젊은 시인이 감히 말해버린 “초록이 치처 단풍드는데”라는 귀기(鬼氣)서린 표현에 내 심장이 찔려서 지금껏 그의 시를 읽고 또 읽는다. 바야흐로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 철이다. 산과 들로 미당의 이 노래를 들고나가 노래 부르며 빛바래가는 가을 초목들에게 눈 한 번 맞춰보면 어떨까. 그리하여 혹 나를 볼 수 있다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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