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문학관 주변 탱자나무 심고 유배체험관 등 4개 전시실 마련 3D 영화영상·상소문 쓰기 체험 매일 200여명·주말 2천명 관광 포항시 남구 장기면은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등 조선시대에만 10여명의 성현이 유배생활을 견뎌 냈다. 이들 성현이 머물던 집과 집필한 서적 등이 담긴 명확한 사료들은 있지만, 정작 누대에 걸쳐 이들의 모습은 현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국가 문화재 당국의 무관심과 복원에 대한 의지 부족이 그 원인이었다. 이에 현재 포항지역 사학계를 중심으로 유배문화재 복원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장기면민 또한 직접 유배문화를 연구하고 복원의 해법을 찾기 위해 부심한 모습이다. 이러한 유배문화 복원의 해법을 경남 남해군 남해읍 유배문학관에서 찾아봤다. ① 유배문화의 고장,
성현들 유배 당시 가옥·죽림서원 복원 목소리 조선시대 사화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옛 성현들의 유배지로 유명했던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는 현재 그 시절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비슷한 역사의 전라남도 강진군과는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강진군의 경우 다산 정약용의 4년간 유배생활을 테마로 다산초당, 동암, 서암, 천일각 등 `정다산 유적지(국자지정 사적 107호)`를 조성, 관광자원화하고 있다. 다산은 1801년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 때 영일군 장기현으로 유배됐다가 그해 11월22일 강진으로 왔다. 포항의 유배문화를 조명한다 ① 유배문화의 고장, 장기 ② 다산과 우암이 머물던 자리 ③ 성현은 가고 빈터만 남아 ④ 유배문화촌으로 활용·보존해야 이후 다산은 다산초당으로 옮겨와
우암·다산 가택 터조차 몰라… 죽림서원 훼손은 사학계 큰 손실 학계에 따르면 유배를 통해 포항시 남구 장기면을 찾은 옛 성현은 조선시대만 해도 10여명은 훌쩍 넘을 것으로 추론된다. 물론 이는 비교적 명확한 사료를 토대로 추론한 사료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료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과거 이들이 남긴 건축 유적물은 구한말을 거쳐오며 거의 모두 훼손된 상태다. 포항의 유배문화를 조명한다 ① 유배문화의 고장, 장기 ② 다산과 우암이 머물던 자리 ③ 성현은 가고 빈터만 남아 ④ 유배문화촌으로 활용·보존해야 먼저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기거하던 가택은 지금은 모두 헐어져 터조차 알아볼 수 없다. 현재 장기초등학교의 운동장으로 변한 그곳은 우암이 심은
송시열·정약용 주옥같은 詩 남겨… 송시열 심은 은행나무 자생 포항 남구 장기면에는 성현들의 무수한 발자취가 남아있다. 당대의 석학,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흔적은 지금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지탱해나가는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 `승정원일기` 숙종 원년 6월19일조에 적힌 경상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암 송시열은 1675년 6월10일 기사환국에 연루돼 4년 동안 장기에 위리안치(주위에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심고 이 바깥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 유배형)됐다. 포항의 유배문화를 조명한다 ① 유배문화의 고장, 장기 ② 다산과 우암이 머물던 자리 ③ 성현은 가고 빈터만 남아 ④ 유배문화촌으로 활용·보존해야 우암은 당시 동생 시도·시걸·부실과 아들 기태, 손자 주석, 증손자 일원·
우암 송시열·다산 정약용 귀양 흔적 곳곳에 산재 한양에서 1천리(약 393㎞)길. 포항시 남구 장기면은 외진 지역 특성으로 조선시대 강진(전라남도), 제주도와 함께 주요 유배대상지 중 하나였다. `귀양살이`로 잘 알려진 유배 형벌을 통해 성현들은 고난 속에서 서책을 탐독하고 시문을 짓는 등 유배지에 독특한 문화를 남기기도 했다. 장기 역시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선생처럼 당대의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머물던 흔적이 아직 곳곳에 묻어난다. 과거없는 현재가 없듯이 이들 옛 성현들이 머물렀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계승해야 할 문화이자 역사의 숙명이다. 포항의 유배문화를 조명한다 ① 유배문화의 고장, 장기 ② 다산과 우암이 머물던 자리 ③ 성현은 가고 빈터만 남아 ④ 유배문화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