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작가가 만난 ‘이 한 사람’
이한엽 ‘극단 가인’ 대표

이한엽(아랫줄 맨 왼쪽) 극단 가인 대표가 지난달 28일 포항아트센터에서 선보인 연극 ‘그대는 봄’이 끝난 뒤 포항연극협회원들과 기념촬영한 모습.

예술가는 돈을 이야기하고 부자는 예술을 이야기한다는 말이 있다. 진정한 예술은 돈을 좇지 않는다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은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1980년대부터 포항에서 극단을 이끌어 온 이한엽 대표는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예술이 돈을 좇는 세태를 비판했다. 가난이 숙명인 연극판. 그것도 변방의 민간 극단은 걸핏하면 물이 새고, 곰팡내 나는 지하 소극장을 전전해야 했다. 낮에는 직장인으로 밤에는 연극인으로 살아가며 사비를 털어 넣어도 적자를 면치 못한다.

그러면서도 돈에 대한 꼬장꼬장한 태도의 근저에는 하고 싶은 연극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단단한 신념이 있었다.

포항연극협회의 마카다연극축전의 공연작 ‘그대는 봄’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포항아트센터(불종로 73 석영빌딩 5층)에서 ‘극단 가인(佳人)’의 이한엽 대표를 만났다.

 

고3 예술제가 첫 무대, 그때 질리도록 연극을 해봐야겠다는 오기 생겨… 그 경험이 내 인생 바꾼 촉매

배우들과 함께 등짐을 져서 만든 첫 소극장 ‘연극무대 늘푸른공간’… 이후 전전하다 ‘극단 가인’ 탄생

개인적으로는 사투리 연극제 하고 싶어… 지역민의 정서가 녹아있는 사투리의 문화적 가치 큰 관심

-포항 시민들 가운데 포항아트센터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될지 싶은데도 평일 저녁의 공연이 만석이었다.

△연극 ‘그대는 봄’은 한 시골 마을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70대 세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홀로 계신 어르신들의 외로운 삶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유쾌한 연기로 풀어내니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두세 차례 관람 온 관객도 있고 지인을 이끌고 다시 찾아 준 관객도 있었다. 관람석이 80석 규모인데 엿새 동안 300∼400명의 관객이 온 것 같다.

-포항연극협회의 마카다연극축전으로 열렸는데 어떤 행사인가.

△‘마카’는 경상도 말로 ‘모두’라는 의미이다. 마카다연극축전은 말 그대로 모두 다 함께하는 연극 잔치라는 뜻이다. 포항연극협회원들이 소속 극단을 초월해 함께 만들어 가는 마카다연극축전은 올해로 11회째다. 연극은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르게 극단 단위로 움직이니 함께 무대에 설 기회가 없다. 1년에 한 작품만이라도 해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포항에서 활동하는 극단은 얼마나 되나.

△활동이 뜸한 극단도 있어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포항시립극단과 극단 가인, 포스코 내 예맥, 은하, 라인극회 등이 있다. 확실한 것은 민간 극단이 점점 줄고 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돈이 안 되어서다. 우리 극단에서도 서울로 간 젊은 배우들이 꽤 되는데 빛을 발하기는 어렵더라.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연극을 하려거든 일을 가지라고 권한다. 청춘을 연극에 받치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아는 한 연극은 빵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요즘은 지원도 다양해지지 않았나.

△관(官)은 배부르게 지원해 주지 않는다. 지원을 구걸하러 다니다가 상처도 받는다. 지원하되 간섭을 말아야 하는데 현실은 안 그렇다. 물론 단돈 얼마라도 가난한 극단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지원의 대가로 올라야 할 무대가 많은데, 연극은 준비 기간이 길고 인원이 많아서 뚝딱 안 된다. 배우들이 행사장에 나가서 달고나를 만든 적도 있다.

- 시간을 좀 더 앞으로 되돌려서 연극에 입문하게 된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

△강화도가 고향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입시에 휘둘리는 현실이 싫어 특차 전형으로 포항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첫 무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예술제였다. 4, 50명이 모여 6개월 정도 연습했다. 방학에 고향도 안 가고 연습에 매진했는데 끝나니 허무하더라. 공연을 마치고 기숙사까지 걸으면서 우거진 나무 사이로 하늘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나중에는 연극을 질리도록 해봐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 경험이 내 인생을 바꾸는 촉매가 됐다. 이후 포스코 사내 연극동호회인 ‘예맥’에서 활동하다가 1988년에 극단을 창단했다.

-극단 가인의 탄생인가.

△당시 극단명은 ‘늘푸른공간’이었다. 영흥초등학교 건너에 ‘연극무대 늘푸른공간’이 첫 소극장이었다. 창고로 쓰던 누추한 무허가 건물이었다. 단원들이 피 끓는 동지애로 천3백여만 원을 모아 보증금을 마련하고 부족한 돈은 몸으로 때웠다. 배우들이 등짐을 져서 만든 소극장이다. 이후로는 환호동과 상도동의 지하 공간을 전전했다. ‘극단 가인’으로 이름을 바꾼 건 상도동 시절이다. 한국전력공사 대구본부 포항지사 건너 건물 지하로 들어가면서 극단 이름을 ‘가인’으로 소극장 이름은 ‘삼통아트홀’로 바꿨다.

-‘삼통’은 어떤 의미인가.

△ 중학생 때부터 사진을 했는데, 카메라를 둘러메고 기계나 신광 등지로 돌아다니다 어르신에게 길을 물으면 “이녁은 어디서 왔능교?”라고 되물었다. ‘이녁’은 젊은 친구를 이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러면서 “삼통 가라”고 알려줬는데 “곧장 가라”는 의미였다. 극장 이름에 곧장 가자는 의미를 담았다.

세상일이 얄궂은 것이, 그즈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워낙 이슈가 커서 그랬는지, 개관 기념 공연 팸플릿에 ‘삼통아트홀’이 인쇄소의 실수로 ‘삼풍아트홀’로 찍혀 나왔다. 삼통아트홀에서 공연 준비를 하던 중에 IMF가 왔다. 극장은 물론 집에도 빨간딱지가 붙었다. 삼풍이 부정을 태웠나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했다.

-어떻게 다시 일어났나.

△5년 만에 다시 모였는데 한 명도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2004년 재기작으로 조창인 원작의 ‘가시물고기’를 연출하면서 연기도 했다. 오랜만에 무대에 오르니 눈물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더라. 배역에 심취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면서 울컥해서가 아닐까.

-포항아트센터는 육거리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안다.

△육거리 인근에서 10여 년 있었다. 처음에는 연극협회 전용 소극장으로 시작했다가 ‘극단 형영’과 ‘극단 가인’이 공동 운영했다. 그러다 7년 전에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우리 소극장은 물과 얼마나 얽히는지 걸핏하면 옥상에서 물이 새고 물난리를 겪었다.

-‘극단 가인’의 단원은 몇 명인가.

△20여 명인데 각자 밥벌이를 해야 하니 상시 가동은 불가능하다. 배우가 부족하니 하고 싶은 작품을 마음껏 못 한다. ‘그대는 봄’도 포항시립극단 배우들이 흔쾌히 승낙해 줘서 수월했다. 출연 배우 중 한 명이 아내인 김용화 배우이다. 극단 가인에서 연극을 시작해서 20여 년 전에 시립극단으로 갔다. 당시 결혼 전이었는데, 못 먹여 살려주겠으니 월급 받으면서 연극을 하라고 보내줬다.

 

이한엽 극단 가인 대표
이한엽 극단 가인 대표

-부부연극인으로 사는 것은 어떤가.

△아직은 낯 간지러워 안 되지만 예순이 넘으면 ‘늙은 부부 이야기’를 함께 연기하고 싶다. 7살 차이인 아내는 고교 3학년 때 극단에 들어왔다. 그땐 나와 눈도 못 마주치던 소녀가 아내가 된 것이다. 나는 예전 생각에 군림하려 들고 아내는 동등한 부부라고 주장하며 충돌이 잦았다. 아내가 시립극단으로 간 뒤로는 공립극단의 역할에 관한 견해차로 치열하게 부딪혔다. 작품은 뭔가 꼬집어줘야 하는데 관(官)에 편승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술인은 예술이란 이름으로 양심을 표현하는 것인데 돈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싫었다.

-지역에서 민간 극단으로 활동하면서 어려움이 많았겠다.

△1980년대 지방에는 민간 소극장이 거의 없었다. 우리 소극장이 경북에서는 제1호이다. 단원들이 등짐을 져가며 만들었는데 살아남아야 하잖아.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이 공연 유료화이다. 입장료 2천 원을 받고 한 명을 앉혀놓더라도 공연했다. 단 한 명도 없어 공연을 못 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연극은 공짜라는 인식을 바꿔야 했다.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런 풍토를 만들지 않으면 문화예술의 씨가 마른다. 단돈 천 원이라도 내고 오는 관객과 초대권 손님은 인식이 다르다.

-지역 소재를 무대화하는 작업에도 관심이 많다.

△누구나 우리 주위의 이야기에 솔깃하다. 철강 도시라는 육중함에 짓눌려 포항의 다양한 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지난 2017년에는 포항의 중심가를 흐르는 칠성천을 소재로 한 연극 ‘칠성천 오동낭구’를 선보였다. 칠성천변에서 일본군에 짓밟힌 어린 위안부의 한 맺힌 절규를 그렸다. 그리고 작년에 포항지역 스토리텔링 창작극 ‘효자동 이야기-효자칠성(孝子七星)’을 공연했다. 칠성강 건너 과부 어머니가 홀아비 만나러 가는 길에 아들이 다리를 놓아주는 이야기이다. 오는 12월 초는 학도병을 소재로 한 ‘탑산의 삽화(揷話)’를 준비 중이다. 탑산에는 한국전쟁 당시 포항여중 전투에서 격렬하게 방어전을 치른 학도병 희생자를 기리는 충혼탑과 기념관이 있다. 포항의 이야기들이 더 발굴되길 바란다. 앞으로도 지역의 이야기를 무대화해서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다.

-앞으로 무대에 올리고 싶은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사투리 연극제를 해보고 싶다. 동일한 작품을 각 지역 사투리로 번안해서 공연하거나, 전국 사투리로 만든 작품을 한군데 모아서 올리는 방식이다. 지역 언어는 한번 소멸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배우들에게 몸에 밴 사투리는 극복의 대상이지만 사투리가 소멸 위기에 처한 지금은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다. 지역민의 정서가 녹아있는 사투리의 문화적 가치에 관심이 크다.

이한엽 대표는

배우이자 연출가다. 1988년 ‘극단 가인’을 창단하고 경북 제1호 소극장을 만들었다. 한국연극협회 포항지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극단 가인’ 대표이자 포항아트센터 대표이다. 지금까지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 ‘마요네즈’,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황소 지붕 위로 올리기’, ‘아버지의 가수’, ‘영일만 친구’, ‘칠성천 오동낭구’, ‘효자동 이야기-효자칠성(孝子七星)’ 등을 무대에 올렸다.

/배은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