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작가가 만난 ‘이 한 사람’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 대표이사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 대표이사

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과의 만남은 설레는 일이다. 남시진 박사는 불국사와 천마총, 황남대총과 황룡사, 분황사, 감은사 등 고고학사의 굵직굵직한 현장마다 함께 했다. 국내 유적 발굴에서 실측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처음으로 측량과 실측을 담당하고 도면을 작성했다. 대한민국 발굴사의 시작을 알리는 천마총 발굴 조사원 중 유일한 경주 사람이다. 한국 고고학사의 오래된 사진 속에서 남시진 박사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불국사 복원을 위한 설계실, 천마총에서 금관을 수습하는 역사적인 순간, 분황사 발굴 조사를 위한 시삽식에도 그가 있다. 한국 고고학 최초의 실측가로 불리는 남시진 박사를 형산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국 유물발굴 최초 측량·실측·도면 작성 ‘한국 고고학 최초 실측가’로 불려

경주시민 유일 천마총 발굴 참여… 국가적 사업으로 언론 취재 경쟁도 치열

실업학교 실습으로 간 불국사 복원 현장서 발굴에 흥미 느껴, 평생 업이 돼

-한국 고고학사에 남을 굵직한 발굴에 다수 참여했다.

△경주에서 이루어진 발굴은 거의 다 참여했다. 1969년 불국사 복원 정비를 위한 발굴이 그 시작이다. 65일간 발굴한 자료를 가지고 현지 사무실에서 바로 설계에 들어갔다. 현지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발굴조사부터 설계, 시공, 감독까지 체계를 갖추어서 추진한 것은 국내 문화유산 복원에서 불국사가 유일하다. 무설전과 비로전, 관음전, 대웅전 회랑, 극락전 회랑이 그때 복원됐다. 불국사 복원 공사 준공식이 열리기도 전에 바로 천마총 발굴에 투입됐다. 원래는 황남대총부터 발굴하려고 했지만, 한번도 도굴이 되지 않은 고분의 조사 경험이 없어 부담을 느낀 김정기 조사단장이 천마총부터 시작해 보자고 건의한 것이다.

-어떤 계기로 발굴에 참여하게 됐나.

△실업학교 건축과를 다니던 중에 ‘실습’으로 나갔다. 신문사 다니는 친척의 소개로 불국사 복원 현장을 소개 받았다. 학교 공부는 콘크리트 건축물 위주여서 목조가 새롭게 다가왔다. 유적지에서 도면을 그리는 일도 흥미로웠다. 발굴팀에서도 쓸만한 녀석이라고 여겨서 데리고 다녔다.

-한국 고고학 최초의 실측가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발굴 현장은 고고학 전공자들이 많지 않은가.

△실측이란 세워진 건물에서 부재 하나하나를 측정하여 도면을 그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설계 도면을 작성해서 집을 짓지만, 실측은 반대로 지어진 건물을 도면화하는 작업이다. 절터를 조사하려면 건축학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국내 발굴 현장의 책임조사원은 고고학자가 대부분이지만 일본에는 건축학 전공자도 많다. 7, 80년대는 실측가가 없어서 내가 각 대학에 강의도 다녔다. 지금은 다수의 고고학과에서 실측을 가르친다.

 

불국사 복원 설계요원들(가장 왼쪽이 남시진 대표이사).
불국사 복원 설계요원들(가장 왼쪽이 남시진 대표이사).

-발굴 50주년을 맞은 천마총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발굴한 최초의 신라 고분으로 기록된다. 반세기 전에는 무덤을 파헤치는 일에 거부감이 컸다고.

△발굴을 하려면 고분 정수리에 말뚝을 박아 기준점을 정해야 한다. 사과를 네 쪽으로 자르듯이, 고분을 사 등분 해서 시차를 두고 무덤을 파는 방식이다. 말뚝을 박으러 올라간 인부들이 눈치만 살피더라. 성미 급한 내가 해머로 말뚝을 몇 차례 내리치니까 그제야 인부들이 달려들어 도왔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시간이 흘러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와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다들 꺼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천마총 발굴이 경주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한 일이었나.

△신라 고분은 경주 사람들에게 신앙과 같은 곳이다. 천마총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1973년은 지독한 가뭄으로 모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무덤을 파서 비가 안 온다고 원망했다. 발굴터에 가건물을 짓고 숙직했는데 밤에 돌을 던지고 가는 취객도 있었다. 그러다가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천마총에서 금관을 들고나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진 것이다. 금관을 수습해 나오던 학예사가 그 자리에 상자를 두고 줄행랑을 쳤다. 나중에 들어보니 금은 전기가 잘 통하는 걸 알고 그랬다고 한다. 그날의 비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불가해한 현상이다. 당시 발굴을 주도한 조사단 8명(김정기 조사단장, 김동현·지건길·박지명 조사원, 윤근일·최병현·남시진·소성옥 조사보조원) 가운데 나를 포함해 6명이 살아있으니 믿어주지. 혹여나 나 혼자서 그 이야기를 한다면 누가 믿어주겠나.
 

-발굴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 어려움도 컸을 것 같다.

△지금은 컨베이어벨트가 있지만 그때는 드럼통의 반을 잘라 만든 관으로 흙을 내려보냈다. 초보자라 항시 긴장된 상태여서 한여름에도 더운지 모르고 일했다. 특종을 위해 쌍심지를 켠 기자들과 각을 세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천마총 발굴조사는 국가적 관심 사업이라 중요사항을 일일이 청와대에 보고했다. 촬영한 필름을 통째로 고속버스에 실어 보내면 문화재관리국에서 전화로 내용을 받아적고 사진을 첨부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청와대 보고 전에 언론에 보도되는 걸 막으려 사투를 벌였다.

-언론 취재 경쟁이 얼마나 뜨거웠나.

△중앙의 각 신문사와 방송사의 문화부장들이 경주에 내려와 있었다. 언론사에서 헬기를 띄우면 넓은 천막을 쳐서 막았다. 발굴하고 나온 사람들의 신발에 묻은 흙을 보고 추측 기사가 나왔기 때문에 내부 작업용 신발을 따로 두었다. 취재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냐면, 기자가 인부의 집까지 따라가서 돈뭉치를 내놓으면 뭐가 나왔는지 한마디만 해달라고 집요하게 물었다더라. 그때 기자가 내놓은 돈이 15만 원이었다. 하루 일당이 700원이고, 80㎏ 쌀 한 가마니가 만 원 하던 때다. 인부가 이튿날 와서 그런 일이 있었다며 끝까지 함구했다고 전해주었다. 철저하게 관리해도 자꾸 특종이 터지니, 경주가 고향이고 친척이 언론사에 있는 나부터 의심받았다. 하루는 김정기 단장이 나를 단국대학교 발굴 현장으로 지원을 보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특종이 터지자, 의심에서 벗어났다. 범인을 종잡을 수 없게 되자 서로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천마총 금관 수습(왼쪽부터 김정기 단장, 김동현 부단장, 남시진 박사).
천마총 금관 수습(왼쪽부터 김정기 단장, 김동현 부단장, 남시진 박사).

-도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인가.

△당시에는 팩스나 메일이 없으니 보고하려면 유선으로 내용을 불러줬다. 우체국에 가야 시외전화를 걸 수 있던 시절이다. 경주우체국 수교환사가 모 신문사 기자 부인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특종을 잡을 욕심으로 교환사를 매수하는 언론사도 있었다고 들었다.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울산과 포항우체국에 가기도 했다.

-학생 신분으로 발굴지에 발을 디뎠다가 나중에는 책임조사원으로 현장을 누볐다.

△불국사, 천마총에 이어 황남대총과 안압지 발굴 현장에 투입됐고 군에 입대해서도 휴가 때마다 발굴터를 찾아 용돈벌이했다. 제대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황룡사에 매달렸다. 1978년에 ‘경주고적발굴조사단(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신)’에 건축직 5급(지금의 9급)으로 취직했다. 감은사지를 시작으로 분황사지, 월성해자, 월정교, 춘양교, 전랑지(신라시대 궁궐터로 추정), 명활산성, 문경 조령원터, 여수 선소(거북선 조선소) 등에서 책임조사원으로 일했다. 특히 감은사지 2차 발굴조사는 남다른 보람과 긍지로 남아있다.

-감은사지 발굴조사에 보람이 남다른 이유는.

△감은사지는 1959년 김정기 박사가 일본에서 돌아와 1차 발굴을 한 곳이다. 정확히 20년 뒤 문무왕 호국 유적지 조성을 위한 2차 발굴조사가 이뤄진 것이다. 발굴보고서를 작성하면서 1차 기록과 상이한 3곳을 발견했다. 먼저 사리함 옆의 원형 구멍이 찰주공일 가능성을 제시했고(1차 보고서는 습기를 모아주는 구멍으로 기술), 김정기 박사와의 열띤 토론 끝에 금당지 기단 갑석 모양을 수정했으며, 석탑의 석질이 응회암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발굴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더 뜻깊겠다.

△사찰은 주로 탑과 금당이 일직선에 배치된다. 그런데 분황사에는 금당인 보광전의 입구가 서쪽으로 향하여 전탑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 특이했는데, 발굴조사로 궁금증이 풀렸다. 고구려의 1탑 3금당(一塔三金當, 사찰에서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법당을 배치하는 방식) 양식을 수입해 신라화한 것이다. 고구려는 탑을 가운데 두고 3금당이 탑을 바라보지만, 분황사는 탑을 남쪽에 두고 3금당이 모두 남향하고 있다. 나는 그걸 신라식 ‘品(품)’자형 가람배치라고 이름 붙였다.

-오랜 시간 공들여야 하는 작업이라 고되지는 않나.

△1년 내내 발굴 조사가 이어지면 12월까지 야외에서 유구 실측을 하게 된다. 눈이 가물거리고 배가 출출해지는 오후가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조사갱 속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4홉짜리로 시작하면 대병으로 두세 병을 비워야 끝이 났다. 주머니 사정이 다들 마찬가지라 10원짜리 라면땅이 안주였다. 분황사 서편에 술을 외상으로 주던 구멍가게가 있었다.

-수개월에서 수년씩 이어지는 지난한 발굴 현장에서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얘기해달라.

△발굴 현장에 사내 결혼이 유독 많았다. 유물 발굴을 잘 하면 사람 발굴도 잘 한다고, 발굴은 사람 발굴이 제일이라고 우리끼리 농담할 정도였다. 동료들끼리 끈끈한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겨서 발굴이 끝나도 인연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2차 감은사지 발굴조사 조사단장이던 조유전 박사가 보신탕을 좋아했는데, 발굴 조사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경주에 모여 보신탕 잔치를 벌였다. 감은사지 앞 대종천에서 은어 낚시도 많이 했다. 미끼 없이 낚싯대를 흔들어 낚은 은어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천마총 발굴 조사팀(왼쪽부터 남시진, 지건길, 최병현, 박지명, 김정기, 소성옥, 김동현, 윤근일).
천마총 발굴 조사팀(왼쪽부터 남시진, 지건길, 최병현, 박지명, 김정기, 소성옥, 김동현, 윤근일).

-평생을 몸담았던 공직에서 퇴임한 뒤에는 경주로 돌아와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을 열어 매진했다.

△2000년도 본청인 대전에서 근무한 10년을 제외하면 평생을 경주에서 보냈다. 건축을 전공한 기술직이라 공무원 인생이 녹록지 않았다. 현장에 실습 나온 학생이 학예직으로 들어와 더 빨리 진급하더라.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50줄에 문화재학과에 들어가 학위를 받았다. 계림문화재연구원을 열어 문화재와 두 번째 인연을 시작하고 창림사 터와 천북 신당리 고분 등을 발굴하고 조사했다.

-경주 유적발굴에 얽힌 생생한 이야기가 많아 한정된 지면이 아쉬울 뿐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평생을 몸 바쳐온 일에 자부심이 크다. 남들은 자식이 문화재 분야로 나간다면 말린다고 하지만 아들이 고고학을 한다고 했을 때 자랑스러웠다. 앞으로 남은 삶은 후배들과 시민들에게 내가 쌓아온 지식을 나눠주고 싶다. 문화재 정책에 대한 자문이나 문화재 인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 대표이사는

1951년 경주 보문동에서 태어나서 계림초등학교까지 6킬로미터를 걸어 다녔다. 경주공고 재학중이던 1969년, 불국사 복원공사 발굴조사와 설계 작업을 시작으로 경주의 문화유산 발굴조사에 참여했다. 1978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입사했다. 만학도로 경주대 문화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1년에는 계림문화재연구원장으로 취임해 창림사터와 천북 신당리 고분 등을 발굴하고 조사했다. 작년 12월 원장 직을 후배에게 넘겨주고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의 생생한 지식을 신문 칼럼과 저서, 강의를 통해 나누고 있다.

/배은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