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한경식 ④
광양의 부름을 받다

고로 건설 현장을 방문한 고준식 부회장과 함께한 한경식,

선생은 번지르르한 수사(修辭)가 아닌 실제로 전투를 치르듯 일했다. 1968년 시작된 포항제철 건설의 역사. 짧지 않은 기간 이어진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건 작은 몫의 역할을 했건 직원들에겐 국가 기간산업 구축에 자신의 힘을 보탰다는 자긍심이 있었다. 30대와 40대를 온전히 포항에서 보내며 자신의 열정을 포항제철에 바친 한경식 선생은 1990년대에 들어서며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맡아 호남으로 간다. 그곳에서의 삶과 생활은 어땠을까?

 

내 젊은 30·40대 열정을 다해 포항제철에서 일하다가 1990년대 호남으로 갔었지. 호남쪽은 노동조합 파업이 자주 있었어. 내 고향이 호남인데 광주고·전남대 졸업으로 노동조합 간부들·관청 등에서의 인맥이 넓었지. 그 덕분에 노사 협상도 원만하게 중재했고….

1990년 중후반엔 승주골프장과 축구단 전남드래곤즈 사장도 했었어. 나는 처음 만드는 작업을 많이 한 것 같아. 골프장 회원권 30억원어치도 팔았고, 태풍 피해 등 위기도 있었지만 잘 넘겼지….

홍성식(이하 홍) :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과 얽힌 추억이 많겠습니다.

한경식(이하 한) : 젊은 시절엔 박태준 회장이 안전모를 쓴 내 머리를 때리기도 했고(그때는 이걸 ‘에밀레종’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강이를 걷어차기도 했지.(웃음)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런 행동을 했던 게 아닐까 싶어.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하라는 뜻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 거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박 회장에게 서운한 마음은 전혀 없어.

홍 : 포항제철 건설 과정과 발전 시기를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한 : 높은 설산(雪山)에 오른 산악인들이 정상에 태극기를 꽂고 눈물 글썽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내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그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돼. ‘전투’라고 불러도 좋을 포항제철의 각종 공사와 프로젝트를 사명감과 애사심, 나아가 애국심을 무기로 완수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듯해.

홍 :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으로 일하던 때였군요.

한 : 종합제철 건설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나라로부터 받은 조직의 한 사람으로서 생애를 걸고 일했지. 멸사보국(滅私報國)의 마음가짐으로 땀 흘렸던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어? 그 시간을 함께한 동료와 선후배들 모두 그런 마음이었겠지.

홍 : 1990년대엔 포항을 떠나 호남으로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 1968년 대한석탄공사에서 포항제철로 이직해 22년이 흐른 1990년에 포항제철 상무이사(건설본부장)를 했지. 꽤 긴 세월이었어. 그 전후로 서울 테헤란로 포스코센터가 만들어졌는데, 거기 건축과 전기 관련 일에도 관여했어. 이후엔 제철장비 철구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와 제철설비주식회사 대표이사도 했지.

홍 : 그러다가 포항에서 광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한 : 광양에서 일하게 된 건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노동조합 운동의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였어. 사용자 측과 노동자 측 사이를 원만하게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고 해야 하겠지.

1987년 6월항쟁 이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이 시기엔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대우조선 등 대기업의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과격화·장기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신규 노조가 급증했고 기존의 한국노총에 대한 어용 시비가 일면서 1990년 1월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었다. (‘두산백과’에서 인용)

홍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한 : 그즈음 경남 창원에서 생산된 재료들이 제때 포항제철로 입고되지 않아 회사가 크게 애를 먹었어. 포항제철은 다른 회사와 달리 1990년대부터 일찍 화상회의를 했지. 서울과 포항, 광양에 있는 임원들이 화상회의를 시작하면 박태준 회장이 주도했어. 박 회장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란 건 많은 사람이 알고 있잖아. 그러니 회의에 참여한 간부들이 긴장을 많이 했지. 어떤 프로젝트라도 기한 내에 완료하지 못하면 엄청난 질책을 받았으니까. 포항제철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제철 장비와 제철 설비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했어. 내가 사장이 되어 그 역할을 맡은 거지.

 

포항제철 사보 ‘쇳물’에 실린 한경식(왼쪽).
포항제철 사보 ‘쇳물’에 실린 한경식(왼쪽).

홍 : 당시 노동조합은 강성이라 다독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한 : 1994년쯤일 거야. 포항제철에서 건설 파트를 만들 때 호남 쪽에서 노동조합의 파업이 자주 있었어. 내 고향이 그곳이니 노동조합 간부들과 노동 관련 관청의 후배들을 자주 만났지. 처음 광양에 가서 시청, 노동청, 검찰청, 경찰서 등을 쭉 다니며 인사했어. 광주고등학교와 전남대를 졸업했다고 소개하니, 그곳 관계자 대부분이 “그러면 선배시군요” 또는 “어, 내 후배네”라고 하더군.

홍 :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인맥이 중요하군요.

한 : 그렇다고 봐야지. 노동조합과의 협의도 편안하게 진행될 수 있었고, 관청과의 업무 협조도 조금은 편했지. 아무래도 타지 사람들보다는 내가 호남의 정서를 잘 알고 아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홍 : 그때 협력업체 노동조합 간부들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해나갔는지 궁금합니다.

한 : 광양에 가면서 노동조합 사람들과 술도 많이 마셨지. 노동조합 간부들도 나와 이야기하면 잘 통한다며 협상의 길을 어렵지 않게 열어줬어. 한번은 광양제철소 사장과 강성 노동조합원 50여 명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자리도 만들었지. “혹시 떠들썩한 인민재판이 열리는 것 아니냐”고 모두 걱정이 많았지만, 내가 중간에서 원만하게 중재했어.

홍 : 그래서 그 자리가 잘 끝날 수 있었던 겁니까?

한 : 협력사 노동자들은 “우리도 누구보다 힘든 일을 하는데 임금이 본사보다 지나치게 낮다”며 그간 쌓인 불만을 쏟아냈지. 사용자 측에선 “앞으로 회사가 발전하면 모두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달랬어. 회사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사람들은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포항제철 연수원에 교육 시설을 갖추고, 좋은 강사들을 부르겠다는 약속도 했지.

홍 : 1990년대 중후반엔 포항제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와 축구단 전남드래곤즈 사장도 하셨지요?

한 : 어째서인지 공장 시설이건 스포츠팀이건 난 뭔가를 처음 만드는 작업을 많이 한 것 같아. 팔자인지도 모르지.(웃음)

홍 : 제철소와 골프장에서의 일은 그 형태가 전혀 다른데 힘들지 않았습니까?

한 : 골프장을 처음 맡았을 때가 생각나는군. 알다시피 골프장은 회원권이 비싸잖아. 그러니 선뜻 그걸 구매할 사람이 별로 없었어. 궁여지책으로 내가 포항까지 가서 협력업체 대표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지. 그에 앞서 골프장 운영이 어려우니 포항제철 재무 담당 이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그랬더니 “먼저 열심히 자구 노력을 해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적극적으로 나선 거지. 그때 회원권을 30억 원어치쯤 팔았을걸.

홍 : 승주골프장을 운영할 때 위기는 없었는지요?

한 : 한번은 큰 태풍이 골프장을 덮쳤어. 물에 휩쓸린 골프장 전체가 박살이 났지. 토사가 쏟아져 내려 인근 논의 벼까지 다 쓰러졌어. 주변 농민들은 당연히 난리를 치며 분노하지 않았겠어? 배상하라고 할 것 아니야. 문제는 골프장으로 들어오는 도로였더라고.

홍 : 그래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한 : 맨 먼저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태풍 피해를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을 고민했어. 그래서 승주 군수를 찾아갔지. 우리가 돈을 댈 테니 군에서는 제대로 배수가 될 수 있도록 주변을 정비해달라고 요구했어. 만약 그걸 그대로 두면 해마다 태풍이 오는 시기에 비슷한 사태가 반복될 테니까. 서울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포항제철로부터 돈을 받아와 승주군에 전달했어. 흘러내린 골프장 토사 때문에 피해를 입은 농가에는 불만이 없도록 보상금을 나눠 주고, 주변을 깔끔하게 정비해달라고 했지. 그렇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

한경식

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

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

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포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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