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하면 누구나 은퇴하게 되는데 정치인도 예외일 수 없다. 최원수 선생은 정계에서 물러나 어떤 일을 했으며, 무엇을 남겼을까? 그리고 그의 장남 최승태 선생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며 최승태 선생과의 대담을 마무리했다.김도형((이하 김) : 최원수 선생은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최승태(이하 최) : 아버지는 동양 고전에 조예가 깊고 붓글씨를 잘 썼어.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였지. 아버지는 말년에 서울 장충동 쪽에 목운서실(木雲書室)을 열고 서예를 가르쳤어. 사실 그 서실
최원수 선생은 영일군수와 제2대 국회의원 임기 동안 굵직한 성과를 내면서 지역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1950년대 초의 혼란한 정치 상황은 그의 정치 인생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맡았던 이승만과 이범석의 관계가 벌어지며 최원수 선생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이범석이 광복 직후에 족청(族靑, 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해서 이끌었는데, 이승만이 이범석을 경계하면서 1953년에 족청계를 숙청하지. 그 바람에 이범석과 가까웠던 아버지도 화를 입게 된 거야. 공천을 받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최원수 선생은 1949년 1월 8일 영일군수에 임명되어 1년 3개월 동안 영일군을 이끈 후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영일군 갑구)에서 당선된다. 군수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합쳐 5년 3개월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공직 생활을 했는데, 그마저도 전쟁 때문에 온전한 의정 활동을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하지만 그가 해낸 굵직한 일을 살펴보면 진정한 지도자는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영일군수의 위상은 대단했어. 경상북도 시장·군수 회의에 가면 큰 목소리를 낼 정도였지. 영일군이 농지가
1948년 5월 10일에 제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는 인구 10만 명 기준의 1개 선거구에서 1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였다. 전국 200개 의석 가운데 경상북도가 33개 의석을 차지했으며 영일군(현재 포항시에 해당)은 갑구·을구의 선거구에서 의원 2명을 선출했다. 최원수 선생은 영일군 갑구에 출마했지만 박순석 목사에 밀려 낙선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1월 8일 영일군수에 임명돼 1950년 4월 20일까지 1년 3개월 동안 영일군을 이끌었다.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가 되는 과정과 당시 포항의 정치, 사회
곧 아흔을 맞이하지만 한경식 선생의 기억력은 스무 살 청년 못지않았다. 포항제철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던 때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줬고, 당시 급박했거나 감동적이던 상황까지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반세기 전에 관계 맺었던 사람들 이름도 잊지 않고 있었다. 전남드래곤즈 사장을 끝으로 일흔 살이 가까워서야 조직 생활을 끝내고 자유로운 생활인으로 살아가게 된 한경식 선생. 그의 노년을 즐겁게 해준 취미는 그림 그리기였다. 주위에서는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솜씨”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한 선생의 70대 이후 삶은 어떠했을까?
선생은 번지르르한 수사(修辭)가 아닌 실제로 전투를 치르듯 일했다. 1968년 시작된 포항제철 건설의 역사. 짧지 않은 기간 이어진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건 작은 몫의 역할을 했건 직원들에겐 국가 기간산업 구축에 자신의 힘을 보탰다는 자긍심이 있었다. 30대와 40대를 온전히 포항에서 보내며 자신의 열정을 포항제철에 바친 한경식 선생은 1990년대에 들어서며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맡아 호남으로 간다. 그곳에서의 삶과 생활은 어땠을까? 내 젊은 30·40대 열정을 다해 포항제철에서 일하다가 1990년대 호남으로 갔었지. 호남쪽은
박태준 회장의 ‘제철보국’ 기치 아래 진행된 포항제철 건설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경제와 관련된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관심 사업이기도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건설 초기부터 여러 차례 포항을 찾아 공사 현장을 점검했다. 당시 포항제철 직원들은 그 시절과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건설공정 브리핑을 하던 박태준 회장이 갑자기 바깥으로 나가는거야. 나중에 알고보니 축적된 피로와 스트레스 탓에 위경련이 온거야.주물선 공장은 포항제철 설비 중 가장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바다를 지키는 함장이 되고 싶었던 청년의 꿈은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로 꺾이고 만다. 그러나 마냥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950년대의 청년들에겐 ‘고민의 시간’마저 사치였으니까. 20대 중반이던 한경식 선생은 광주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꿈을 모색한다. 1968년 5월 15일 포항 건설본부 전기 담당으로 발령받아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시발택시를 타고 동촌동에 내렸어. 아름드리 소나무밭 오솔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가니 나무와 슬레이트로 지은 2층 건물이 보였어. 이른바 ‘롬멜하우스’로 불린 포항제철건설본
한국인이면서도 자유롭게 한국어를 말할 수 없던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태어나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겪었다. 청장년 시절엔 포항의 허허벌판에 거대한 제철소가 들어서는 역사적 과정에서 작지 않은 역할을 해냈다. 포항제철 건설본부장으로 일했던 한경식(韓璟植) 선생의 삶에는 ‘왕국의 몰락-식민지-해방된 가난한 나라-참혹한 민족 간 전쟁-비약적 경제 발전’으로 요약되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지난 늦봄, 현재 그가 거주하는 전남 순천을 찾아 사흘에 걸쳐 드라마틱했던 인생 편력을 세세하게 들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다섯 번째 인터뷰하던 날에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선생과 동해면 신정리 선돌과 금광리 고인돌군을 둘러보고 금광저수지를 산책했다. 함께하는 네 시간 내내 선생은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했다. 선생의 눈에는 지역의 거의 모든 것이 역사의 흔적이었고 이야기보따리였다. 신정리 선돌을 보러 가던 중에 선생이 승용차의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천 문충리에 가면 포은 정몽주 생가터가 있는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승마석뿐이지. 그래도 거기가 정몽주 생가가 아닌가. 이육사 시인도 일제강점기 때 도구에 있는 동양 최대 규모의 포도
1885년 포항 동해면 임곡리 출신인 석곡은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로 알려졌어. 원래 유학에 바탕을 둔 학문에서 출발해 성리학까지 통달한 분이지. 놀라운 일은 이분이 모든 학문을 독학으로 했다는 것이지.내가 처음 석곡 묘소에 간 게 2008년이야. 소문학회 회원들이 석곡 묘소의 참배를 다닌 지 14년쯤 되었을 때지. 그 후로 방송에 나갈 때마다 석곡을 이야기했고, 그다음 해 묘소를 참배할 때는 지역 언론사의 기자들과 함께 갔어. 그때 석곡 묘소 참배하는 것을 YTN에서 소개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지.포항이 낳은 큰 인물로 석곡
황인 선생은 포항이 고인돌, 선돌 같은 선사시대 유물 외에도 명망 높은 고승을 낳은 곳임을 발견하고 널리 알려왔다. 특히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배천희(裵千熙)와 조선시대 남파(南坡) 대사에 대한 재조명은 선생의 대표적인 업적이다.(여국현=여) : 선생님은 고려시대 배천희 국사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황인=황) : 배천희 국사는 1307년 흥해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해 19세에 승과에 합격했지. 그 후 10여 개 사찰의 주지를 지내다가 1367년(공민왕 16년)에 국사가 되었고 1382년 76세로 입적하셨어. 당
황보 집성촌을 찾아가던 선생은 우연히 고인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우연은 이후 선생이 포항의 고인돌과 선돌을 비롯한 선사시대 유물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포항 지역에 50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 내가 하나하나 다 기록했는데, 사진만 해도 500장이 넘어. 기계면에서만 65기, 흥해와 동해에 각 30기 등 포항에 213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을 확인했지. 할배짝지돌은 선돌인데 할배짝지돌을 찾은 후 할매짝지돌을 수년간 찾아 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지. 그러던 어느해 신정리에서 마을 앞 보 공사를 하다
선생은 황보 집성촌에 찾아가 황보인 가문의 충직한 여종 단량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뿐만 아니라 갑연, 순량 등 여종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碑)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포항이 예부터 충절과 보은의 고장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종 단량은 가문의 대를 이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황보인의 손자 황보단을 물동이에 넣고는 뒷문으로 도망쳤어. 구룡포읍 성동리에 옮겨 평생을 숨어 살면서 황보인의 손자 단을 키웠던 거지. 황보인 가문의 대가 안 끊기고 구룡포읍 성동리에 영천 황보씨 집성촌이 형성된 데는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야. 지금도 구룡포읍 성동리
이 글은 필자가 포항 지역의 사학자 황인 선생과 나눈 다섯 번의 대담과 수차례의 통화 그리고 서면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당시 선생은 임플란트 시술 중이었고, 필자 또한 서울과 포항을 오가야 하는 상황이라 인터뷰가 순조롭지 않을 수 있겠다고 우려했으나 기우였다. 첫 만남의 대담부터 선생은 매번 두 시간이 넘도록 포항의 역사와 문화, 문화재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학자 E. H. 카의 말이다. 이 말이 맞다면 개인 또는 사회가 자신의 역사를 잊거나 혹은 왜곡해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
인터뷰는 매번 최인수 선생의 단골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나서 진행했는데 메뉴는 늘 된장 전골이었다. 식사하는 동안 선생은 필자가 물을 따르거나 수저를 놓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손수했다. 어린 아들에게 밥을 먹이는 아버지 같은 행동이었다. 최인수 선생은 포항시 체육회 부회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지역 체육계를 보살피는 일을 계속해 나간다.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 간 간격 좁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포항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직 수락, 종사자 처우개선 노력원로들 모아 지난 2014년
1963년 제1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대구에서 열렸다. 대구와 경북의 행정구역이 분리되기 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정구 선수로 제1회 도민체육대회에 출전한 최인수 선생은 이후 44년간 선수, 혹은 임원으로 도민체육대회에 참가하게 된다.김 : 포항시 체육회에도 오래 몸담으셨지요?최 : 1975년에 포항으로 온 지 얼마 안 돼 체육회 이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때는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되기 전이었고 체육회도 지금처럼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지. 변변한 사무실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거든. 체육을 전공한 사람이 흔치 않
1980년 5월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포철공고에 축구와 야구 중 교기 육성 종목 하나를 선정해 창단하라고 지시했다. 이 업무를 맡은 최인수 선생은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충분한 기초자료를 수집한 후에 우수 선수를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종목을 선택한다. 박태준 회장님이 축구와 야구 중 하나를 정해 교기(校技)로 육성하라고 지시하셨어. 그렇게 1981년에 야구부를 창단, 1983년 포철중·1985년에 포철공고 축구부가 창단했지야구부는 창단하고 얼마 되지 않아 큰 성과를 거뒀어. 창단 3년 차에 봉황대기·청룡기·전국체전·황금사자기서 준우
최인수 선생은 1975년에 포항 대동고등학교에 부임하게 된다.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20여 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대구를 떠나 객지로 오기까지 결심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오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을 겪었을 터이다. 대동고 개교 2년이 지난 시점이었지. 신생 학교여서 학생 유치에 어려움이 많았던 모양이야. 교장은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당시 교사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정구대회 개최를 생각한 거야. 그 대회에 중학교 교사들을 초청해 우수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홍보할 구상을 한 거지. 그뿐 아니라 대동
포항 역사에서 체육은 중요한 맥을 이룬다. 1945년 조선무술회를 결성한 동암(東庵) 문달식의 인생을 되짚어보면 포항이 김정행, 정성숙, 김재범 같은 한국 유도계의 거물을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국가대표로 한국 여자농구를 이끌었던 이귀복, 이춘자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동지중·고등학교 영어 교사 남인우가 포항에 농구를 들여온 1951년을 만나게 된다. 포항수산고(현 한국해양마이스터고) 3학년 천인태는 1981년 한 해 동안 7개의 한국 신기록을 수립해 ‘포항 물개’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정규 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