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한경식 ③ 포항제철의 탄생과 성장을 함께하다

포항제철소 2고로 건설 현장에서 박태준 회장과 함께한 한경식.

박태준 회장의 ‘제철보국’ 기치 아래 진행된 포항제철 건설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경제와 관련된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관심 사업이기도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건설 초기부터 여러 차례 포항을 찾아 공사 현장을 점검했다. 당시 포항제철 직원들은 그 시절과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건설공정 브리핑을 하던 박태준 회장이 갑자기 바깥으로 나가는거야. 나중에 알고보니 축적된 피로와 스트레스 탓에 위경련이 온거야.

주물선 공장은 포항제철 설비 중 가장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 1974년 10월 1일, 70일 공기 단축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그때 일은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거야.

제1고로 제2대 화입식이 열렸던 날 나를 포함해 작업을 진행했던 선후배들 모두 목이 쉴 정도의 큰 함성으로 만세를 불렀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전례가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니까.

홍성식(이하 홍) :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 공사 현장을 자주 찾았지요?

한경식(이하 한) : 1970년 4월로 기억해.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정비공장을 시작으로 한 종합 착공식을 마치고 상황실에서 건설 공정에 관한 브리핑을 하는데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어.

홍 :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한 : 당시 김완주 건설기획실장과 나는 상황실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마련된 조작실에서 대기 중이었어.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에게 공정표를 펼치고 설명을 이어가던 박태준 회장이 갑자기 바깥으로 나가는 거야. 모두 깜짝 놀랐지. 박 회장을 대신해 윤동석 부사장이 브리핑을 이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축적된 피로와 스트레스 탓에 박태준 회장에게 위경련이 온 거야. 부랴부랴 대통령 주치의가 응급처치했지.

홍 : 국가원수가 참석한 브리핑에서 그런 일이 생겼으니 모두 당황했겠군요. 그 후 어떻게 됐습니까?

한 : 윤동석 부사장의 설명이 끝난 후 그 긴장된 시간에 박 대통령이 압연공장과 고로의 위치에 대해 질문하는 거야. 당시 윤동석 부사장은 공장과 고로를 축소해 만든 모형에 익숙하지 않았거든. 그러니 설명하다 실수할 수도 있었지. 그때 내가 임기응변으로 윤 부사장이 답변을 잘할 수 있게 조작실에서 작은 빨간 등을 깜빡거려 공장과 고로의 위치를 알려줬어.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것은 그런 상황을 눈치챈 육영수 여사가 나갈 때 조작실을 향해 수고가 많다는 듯 웃으며 자상하게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이야.

홍 : 1972년에 포항제철에 만들어진 ‘주물선 건설추진반’에 대해 이야기 좀 해주시죠.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한 : 주물선 공장은 초기에 상당 기간 적자를 면치 못할 거라고 전망돼 회사로서는 달갑지 않은 설비였어. 어쨌건 최환용 건설반장 등 추진반 다섯 명이 서울 사무소에 파견돼 휴일도 없이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예산을 편성하며 구입 사양서 등을 작성했어. 그때도 잊지 못할 일을 겪었지.

주물선은 용광로에서 나온 용선에 철·실리콘 합금인 페로실리콘을 첨가해 덩어리 모양으로 굳힌 선철(銑鐵)을 지칭한다. ‘주물’이란 쇳물을 틀에 넣고 원하는 모양으로 만드는 과정이고, ‘선’은 선철을 줄인 말로 쇳물을 의미한다. 주물선은 주물선 출선-전·후 배재 처리-주선 처리-야드 저장-제품 선별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것이 제철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홍 : 어떤 문제였습니까?

한 : 본사에서 ‘70일 공기 단축’ 지시가 떨어진 거야. 그런데 협조해줘야 할 일본 회사가 난색을 표명했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재가 이어져 석유파동이 일어났지. 그때 포항제철은 한 번 세운 목표는 어떤 이유로도 변경할 수 없었어. 비상이 걸렸지. 이영우 부장이 당장 일본으로 건너가 강력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한국에 남은 우리도 병행작업 실시와 돌관 야간작업 등을 숨 가쁘게 진행했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모두 사표를 내고 영일만에 뛰어들겠다며 전쟁에 임한 군인처럼 일했지.

홍 : 힘겨운 시간이었겠군요.

한 :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운 여름에 미친 사람처럼 현장을 바쁘게 오갔지. 그 험난한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려면 하루로는 부족해. 어쨌건 결과적으로 열풍로 건조를 위한 화입식(처음 불을 넣는 일을 축하하는 의식) 전날 부산항에 도착한 건조용 버너를 밤을 꼬박 새워 설치해 열풍로 화입식을 할 수 있었어. 지금도 많은 사람이 말해. “주물선 공장은 포항제철 설비 중 가장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다”고. 1974년 10월 1일, 70일 공기 단축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그때 일은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거야.

 

포항제철소 현장에서 한경식.
포항제철소 현장에서 한경식.

열풍로는 용광로에 열풍을 불어넣는 장치로 모양은 철판으로 된 원통인데, 지름이 6미터, 높이는 20미터 이상이다. 원통의 외피 속에 내화벽돌이 격자 모양으로 쌓여 있다. 이 안에 있는 내화벽돌층 사이에 용광로의 고로가스를 통과시켜 예열하고, 다음에 벽돌층 사이로 냉풍을 보내 열풍을 만든다. 이 열풍의 온도는 섭씨 600∼800도다. 이렇게 예열한 열풍이 용광로 내로 송풍된다.(『두산백과』에서 인용)

홍 : 그 외에도 포항제철 건설 초기에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한 : 그랬지. 날짜까지 떠오르는데 1977년 4월 24일 일요일이었어. 오랜만에 즐기는 휴일이라 늦잠을 자고 있는데 근처에서 소방차 사이렌이 크게 울리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아보니 회사에 불이 났다고 하더군. 그때는 내가 제1고로 추진반장을 맡고 있던 터라 긴급출동 연락을 받지 못한 거지.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걱정되어 바로 회사로 갔어.

홍 : 현장에서 발생한 화재가 컸나요?

한 : 급하게 회사로 달려갈 때는 엄청나게 큰 불일 거라고 예상했지. 정문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제1제강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다행히 상황이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어. 진화작업도 순조로운 것 같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장으로 접근했어. 그런데 소방관들은 보이는데 정비요원들이 어디로 갔는지 없더라고. 제강건설 부서에 근무하며 일본에 연수도 다녀왔고, 전기는 내 전문 분야잖아. 그 감각으로 살펴보니 지하에 있는 케이블이 타면서 전기실로 연기가 퍼지고 있었어.

홍 : 심각한 상황이었습니까?

한 : 그랬지. 그래서 급하게 정비요원들을 찾았더니 다들 회의 중이라고 하는 거야. 당장 회의실 문을 열고 “지금 뭐하는 거냐”고 소리쳤지. 지하에서 타고 있는 불이 변전소로 옮겨갈 수 있다고 상황을 설명하니, 복구 회의 중이던 사람들이 그때서야 사태가 끝난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어. 내 의견을 받아들인 김준영 이사의 지시로 정비요원들의 응급 대처가 진행되었지. 불이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지하의 케이블을 급하게 절단하는 등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전기실 기기가 적지 않게 파손되었어. 그래도 거기서 화재를 잡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지.

홍 : 화재의 원인은 무엇이었고, 어떤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웠나요?

한 : 크레인 기사가 졸음운전을 하다가 전로(轉爐: 철을 제련할 때 압착된 공기를 불어 넣고 높은 열을 가해 불순물을 산화시켜 흡수함으로써 순수한 금속을 만드는 용광로)에 부어야 할 쇳물을 바닥에 쏟은 거야. 천만다행으로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화재는 포항제철 역사상 큰 피해를 입힌 사고 중 하나로 기록되었어. 화재가 있었던 그다음 날 복구본부를 만들었지. 김준영 이사가 본부장을 맡았고, 나도 기획조정 담당을 맡아 신속한 복구를 통해 철강 생산이 되도록 빨리 재개될 수 있도록 노력했어. 그때도 밤샘을 밥 먹듯 했지.(웃음)

홍 : 포항제철의 탄생과 성장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장년 시절을 보내셨군요. 돌아보면 가슴 뿌듯한 기억도 많을 듯합니다.

한 : 제1고로 제2대 화입식이 열렸던 날도 잊을 수 없어. 그 프로젝트도 애초엔 공사 기간이 78일로 예정됐지만, 57일 만에 마쳤지. 그게 우리나라 최초의 고로 개수작업이었어. 나를 포함해 작업을 진행했던 선후배들이 목이 쉴 정도의 큰 함성으로 만세를 불렀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전례가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그날의 기억은 내 인생의 자부심으로 남았어.

한경식

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

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

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포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