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한경식 ① 나주에서 진해까지

한경식 선생이 그린 작품.

한국인이면서도 자유롭게 한국어를 말할 수 없던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태어나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겪었다. 청장년 시절엔 포항의 허허벌판에 거대한 제철소가 들어서는 역사적 과정에서 작지 않은 역할을 해냈다. 포항제철 건설본부장으로 일했던 한경식(韓璟植) 선생의 삶에는 ‘왕국의 몰락-식민지-해방된 가난한 나라-참혹한 민족 간 전쟁-비약적 경제 발전’으로 요약되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지난 늦봄, 현재 그가 거주하는 전남 순천을 찾아 사흘에 걸쳐 드라마틱했던 인생 편력을 세세하게 들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광복된 후 선생님들이 우리말을 되찾았지. “앞으로 나라가 잘 되려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어.

고향인 나주 떠나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했는데 전쟁이 터졌지. 겨우 열다섯 나이에도 이른바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보며 그 참혹함 알게 됐어.

해군사관학교는 학비를 내지 않고 다닐 수 있었어. 나 말고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이 지원했지. 그때 사관학교 인기는 명문대보다 높았어.

홍성식(이하 홍) : 고향이 전남 나주라고 들었습니다. 아직 주소가 기억나시는지요?

한경식(이하 한) : 나주 영산포 오량리야. 지금은 행정구역상 명칭이 오량동으로 변했다고 해.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태어났지.

홍 : 지금 세대들에겐 까마득한 옛날이라 느껴질 겁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아직 남았습니까?

한 :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범한 농부였어.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광복되었지. 그전 일제강점기 때는 동네에서 쇠로 만든 절굿공이와 놋그릇 같은 걸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겼어. 전쟁에 사용할 물자가 필요하니까. 할머니가 아끼던 무쇠 화로를 강탈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런 것을 뺏기지 않으려고 집 안 곳곳에 숨겨야 했지. 우리 동네에도 이른바 ‘친일파’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숨긴 물건들을 찾아내려고 집집을 뒤지던 게 기억나. 그러니 어린 마음에도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 없었지.

홍 : 또 다른 잊히지 않는 추억이 있을까요?

한 : 소나무에서 흘러내리는 송진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걸 모으느라 고생하던 것도 떠올라. 겨우 열 살 안팎의 애들에게는 힘든 일이었지. 게다가 학교에선 우리말을 못 하게 하고 일본어를 억지로 쓰게 하던 시절이었어. 심지어 집에서도 일본어를 쓰라고 교사들이 강요했지.

 

홍 : 나라를 뺏긴 민족의 서러움을 제대로 겪으신 거군요.

한 : 그렇지. 형제끼리도 서로 감시하게 했으니까.

 

일본은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전쟁 물자 조달에 총력 동원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식민지인 우리나라는 물자 부족으로 비료와 농기구 같은 농업 생산에 필요한 물자까지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힘들었다. 여기에 노동력까지 징발해가니 농촌사회는 더욱 힘든 상황이 되었다고 ‘국사편찬위원회’는 설명한다.

홍 : 형제들이 많았습니까?

한 : 일곱 남매야. 남자 둘에 여자 다섯. 형님이 한 분 계시고 여동생이 많았어. 우리 집만이 아니라 예전엔 대부분 그렇게 자식을 많이 낳았지.

 

한경식 선생
한경식 선생

홍 : 다들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공부는 열심히 했을 듯합니다.

한 : 지금처럼 동네마다 학교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아니라서 꽤 먼 길을 걸어 다녀야 했는데도 모두 열심히 다녔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이 공부밖에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나이 많은 학생들도 있어서 1등은 하지 못했지만 공부는 제법 잘했어. (웃음)

홍 : 1945년 광복 즈음의 기억이 나는지요? 동네 분위기 같은 것 말입니다.

한 : 광복되니까 선생님들이 우리말을 하셨어. 그리고 “앞으로 일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나라가 잘되려면 여러분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지.

홍 : 이른바 친일파, 일본에 우호적이던 사람들은 광복 이후 어땠나요?

한 : 30년 이상 억눌린 감정이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공출에 앞장서며 일본에 협력하던 이들을 잡아서 망신을 주고 단죄하려고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나서서 말렸어. “저들도 먹고살려고 친일한 것이니 과거는 용서해주자”고 하더라고. 부친이 동네에서 신망이 두터웠거든. 그러니까 성난 사람들도 화를 조금 가라앉히곤 했지.

홍 : 중학교는 어디로 진학하셨지요?

한 : 고향인 나주를 떠나 광주로 가서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했어.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지. 당시 광주사범학교와 광주농업학교는 성적이 좋아야 갈 수 있었어. 그러니 그 학교에 입학하면 동네 어른들이 크게 칭찬해주었지. 지역에서 조합장을 하던 아버지도 동네 사람들에게 한턱냈어. 내 기억에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풍족하진 않아도 자식들을 대처로 보내 공부시킬 형편은 되었던 것 같아.

홍 : 선생님이 중학생이던 시절에 전쟁이 터졌겠군요.

한 : 맞아. 중학교 2학년 때 전쟁이 터졌어. 전쟁 탓에 학교에 못 가고 집에 와 있는데, “학생들은 학교에 인명 등록을 해야 한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나주에서 광주까지 여덟 시간 넘게 걸어서 갔지. 그런데 학교 농기구 창고 근처에 가니 누군가 두들겨 맞는 소리가 나더라고. 이른바 좌우익의 심각한 대립과 갈등이 학교에도 있었던 거지. 다행히 그때 나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으니 어리다고 인명 등록만 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 그즈음 우리 동네에서도 몇몇 사람은 맞아 죽기도 하고 그랬지. 전쟁이란 게 참혹하다는 걸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어.

홍 : 전쟁이 끝난 후엔 어땠습니까?

한 : 광주농업학교에서 다시 시험을 보고 광주고등학교에 들어갔어.

홍 :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 좀 해주시죠.

한 : 1950년대 중반이었는데 그때 자취를 했어. 어머니가 귀한 아들 굶으면 안 된다며 쌀을 보내주셨지. 내가 쌀 한 말을 들고 나주에서 광주까지 오고 그랬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자식들 공부시키기가 쉽지 않았지. 신문 배달을 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었어. 나주와 광주 사이를 오가는 버스가 다니다 말다 했으니, 집에 오가기도 쉽지 않았지. 다행히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나 학비를 면제받기도 하고, 먼저 광주에 가 있던 누님의 친구가 도와주기도 해서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어.

홍 : 광주고 졸업 후엔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고 들었습니다.

한 : 서울대 공대를 가려고 했는데,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이 그보다 먼저 있었어. 바다를 좋아했기에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지. 어릴 때 고향 동네 길거리에서 만나던 마도로스(matroos)들이 멋져 보였거든. 게다가 해군사관학교는 학비를 내지 않고 다닐 수 있었어. 나 말고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이 지원했지. 그때 사관학교 인기는 어떤 명문대학보다 높았어.

1946년 1월 17일 해군병학교로 개교한 해군사관학교는 한국의 해군 및 해병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줄여서 ‘해사’라고 불리며, 경상남도 진해에 자리한다. 한경식 선생이 입교하던 1950년대엔 가정형편이 어려워 일반 대학 진학이 힘든 우등생 다수가 육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를 선택하기도 했다.

홍 : 해군사관학교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한 : 나는 해사 13기로 입학했어. 스무 살이 넘으면 키가 안 자란다던데 나는 거기서 7센티미터나 컸지. 고등학교 때는 잘 먹지 못하다가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니 그랬던 것 같아. 공부도 열심히 했어. 학년에서 5등 안에는 들었으니까.

한경식

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

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

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한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