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황 인 ③
고인돌과 선돌, 암각화의 발견

호미곶면 강사리 고인돌.
호미곶면 강사리 고인돌.

황보 집성촌을 찾아가던 선생은 우연히 고인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우연은 이후 선생이 포항의 고인돌과 선돌을 비롯한 선사시대 유물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포항 지역에 50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 내가 하나하나 다 기록했는데, 사진만 해도 500장이 넘어. 기계면에서만 65기, 흥해와 동해에 각 30기 등 포항에 213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을 확인했지. 할배짝지돌은 선돌인데 할배짝지돌을 찾은 후 할매짝지돌을 수년간 찾아 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지. 그러던 어느해 신정리에서 마을 앞 보 공사를 하다가 도랑에서 큰 돌이 발견됐는데 바로 할매 짝지돌이었어.

여 : 단량의 일화가 선생님께서 포항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겠군요.

황 : 그렇기도 하지만 내가 더 놀라고, 포항이 예사 고장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건 그 집성촌(구룡포읍 성동3리)을 찾아가던 도중에 일어난 일 때문이지. 내가 그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방앗간이 하나 보이더군. 여기에 웬 방앗간이 있나 싶어 가보았더니 방앗간 뒤에 고인돌이 있는 거야. 하나도 아니고 자그마치 네 개나. 그러고는 상정 쪽으로 조금 가다 보니 왼쪽에 언덕이 보이는데, 거기 농가에 또 고인돌이 있고, 또 조금 가다 보면 고인들이 주욱 있더라고.

여 :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고인돌이 있다는 걸 알고 찾아다니다가 발견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죠?

황 : 그렇지. 황보 집성촌을 안 것도 그렇고 방앗간 뒤 고인돌도 그렇고, 그게 다 우연이었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을 텐데 내가 국사학을 전공했으니 보이기도 한 거지.

 

동해면 공당리 고인돌.
동해면 공당리 고인돌.

여 : 그저 운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은 우연이었더라도 직접 찾아 나선 선생님의 관심 그리고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낸 고인돌이 자기를 알아본 선생님을 부르는 힘이 더하여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황 : 그렇기도 하겠지. 하여간 이것 참 재미있다 싶은 생각이 들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봤어. 당시 컴퓨터가 있나 인터넷이 있나. 그냥 닥치는 대로 논문집을 뒤져보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지. 그런데 논문집에 이쪽 지방(구룡포)에는 고인돌이 없고 기계(杞溪)에 몇 기(基)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어. 그래서 우선 ‘여기 고인돌이 있습니다’ 하고 문교부에 조사보고서를 냈지.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고인돌이 한두 군데에 있는 게 아니야. 성동1리에 가니 거기는 논 가운데에 고인돌이 여섯 개나 있더라고. 그때부터 내가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싶어서 직접 보고 조사하고 기록하기 시작했지. 안 다닌 데가 없다시피 돌아다녔어. 주말이면 아예 집을 나와 미친놈처럼 논이며 밭이며 산을 헤매고 다녔지.

여 : 주말마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기억에 남는 일도 많았을 것 같군요.

황 : 웃지 못할 일이 많았어. 황보 입향조 비석을 탁본하러 뇌성산(磊城山)에 갔을 때 일이야. 내가 그 비를 발견하고는 문화재 관리 지원을 받으려고 탁본하러 갔어. 뇌성산에서 탁본하고 내려오는데 경찰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파출소로 데려가는 거야. 못 보던 사내가 양복을 입고 사진기, 나침반, 지도에 카메라까지 들고 산에서 내려오니 마을 사람들이 간첩이라고 신고한 거지. 별일 없이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런 황당한 일이 한두 번 아니었어.

여 : ‘영일만의 3천 년 문화유산’이라는 방송을 보니까 선생님께서는 고인돌을 비롯해 발굴한 문화유산을 전부 지도에 기록해두었더군요.

황 : 그랬지. 다 기록했어. 직접 찾아다니며 얻은 자료를 보면 포항 지역에 50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 내가 하나하나 다 기록했는데, 사진만 해도 500장이 넘어. 내가 기록한 고인돌 조사 지도를 가지고 방송국에서 영일만 지역의 고인돌 분포도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었어. 그렇게 해서 기계면에서만 65기, 흥해와 동해에 각 30기 등 포항에 213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을 확인했지. 그러고 나니 나중에 대학교수들도 내게 찾아와 자료를 받아 갔어. 그런데 그 고인돌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어. 남아 있는 게 얼마 안 돼.

 

할배짝지돌
할배짝지돌

여 : 그건 정말 안타깝습니다. 고인돌 외에 포항의 선사시대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말씀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황 : 암각화와 선돌도 많지. 암각화는 대표적인 것으로 1990년 흥해읍 칠포리에서 발견된 게 있어. 약 3천 년 전 청동기시대 유물로 경북 유형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되었지. 청하면 신흥리 암각화는 특별한 성혈(星穴)을 보여줘 더 중요한 의미가 있어. 아마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한 게 아닌가 추측하는데 그 성혈이 바위에 여럿 남아 있지.

여 : 선돌은 무엇을 말하고, 어떤 것이 있는지요?

황 : 선돌은 말 그대로 돌을 세워놓은 것이지. 주로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어떤 믿음을 표현하거나 어떤 사건을 기념하려고 세운 것으로 보면 될 거야. 동해초등학교와 신정리 마을에 세워둔 게 있는데, 동해초등학교에 있는 거는 할배짝지돌, 신정리에 있는 거는 할매짝지돌이라 부르기도 해.

여 : 두 이름이 서로 어울리는 걸 보니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처럼 서로 한 쌍을 이루는 것처럼 들립니다.

황 : 그렇지. 그런데 두 선돌에도 사연이 있어. 원래는 할배짝지돌만 발견되었는데, 기록을 살펴보니 할배짝지돌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할매짝지돌이 있더군. 그걸 찾고 싶어서 신정리, 금강리 부근을 몇 년 다녔는데 결국 못 찾았지. 그러던 어느 해 신정리 마을청년회장한테 연락이 왔어. 마을 앞 보(洑) 공사를 하다가 도랑에서 커다란 돌을 하나 찾아서 꺼내 놨다고. 그래서 가보니 수년간 찾던 바로 그 할매짝지돌이었어. 그걸 수호신으로 삼아 마을 입구에 세워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지.

여 : 선생님께서 선돌을 찾아다니시는 걸 알고 신정리 마을청년회장이 연락했군요. 그걸 평범한 돌로 여겨 버리거나 깨버리기라도 했다면 사라지고 말았겠습니다.

황 : 그럴 수도 있었지. 사실 여기 와서 내가 고인돌을 찾아다닐 때만 해도 사방에 고인돌이 보였어. 상정, 중산, 공당까지 밭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사방에 고인돌이 늘어서 있었거든. 그런데 그때는 사람들이 그게 중요한 걸 알았나. 문화재라는 개념이 있었어야 말이지. 밭 간다고 쟁기질하다가 걸리면 치워버리거나 깨버렸고 나중에는 포클레인으로 부수기도 했지. 그렇게 사라진 고인돌이 셀 수 없이 많았어.

 

신광면 마석리 선돌.
신광면 마석리 선돌.

여 : 고인돌이나 선돌 같은 거석문화의 유물이 청동기시대의 흔적을 보여준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 지역의 고인돌, 선돌이 제대로 보존이 안 된 것은 정말 아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지역에 고인돌이 많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일까요?

황 : 고인돌은 쉽게 말해 부족을 이끄는 족장의 무덤이야. 고인돌이 많다는 것은 큰 규모의 부족이 살았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예부터 우리 지역이 그만큼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는 걸 말해주지. 고인돌과 선돌이 많이 사라졌다는 건 3천 년 된 우리의 역사가 사라진 것이나 다를 게 없으니 가슴 아픈 일이지.

고인돌과 선돌, 암각화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것을 만들고 세우고 깎아낸 선사시대인들의 삶의 흔적, 곧 그들의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고인돌 하나, 선돌 하나, 암각화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곧 선조들의 삶의 흔적이 지워지고 잊히고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보존하고 물려주어야 할 문화는 특정한 물건이나 대상만이 아니다. 그 안에 담겨 전해지는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이들의 삶의 방식이자 역사다. 다행히 선생의 발굴과 발견은 그 후 지역의 많은 관심을 불러와 고인돌을 보존하는 마을 자치 모임이 생기는 등 다양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황 인

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