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권순남 ⑤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과 그 이후

포항 중앙상가 자원봉사 참여 홍보부스 운영(2012.5.4).

국민의 5대 의무 중에 자원봉사가 포함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분, 자원봉사자가 사회적 자본의 중심축이라고 하시는 분, 현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분, 교육, 워크숍, 회의는 전국 어디든 다니면서 출근은 칼같이 하시는 분. 자원봉사센터 직원들이 떠올리는 권순남 소장의 모습이다. 그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사진은 몇 장 없는 권순남 선생의 이야기를 정리해본다.

최미경(이하 최) : 정말 많은 봉사활동을 하셨는데 사진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권순남(이하 권) : 어느 해 크리스마스였나. 성모자애원 아이들에게 선물을 들고 간 적이 있었어. 대개 아이들이 과자를 받으면 바로 먹기 바쁜데 자애원 아이들은 과자를 앞에 두고도 가만히 앉아만 있었지. 내가 한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과자 싫어해?”라고 묻자, “사진 찍고 먹어야 하잖아요”라고 대답하더군. 그때 ‘이 아이들은 누가 무엇을 가지고 와도 사진 먼저 찍어야 손을 댈 수 있다는 걸 배웠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내렸어. 나는 그 후로 되도록 사진을 남기지 않는 습관이 생겼지.

 

봉사를 하며 보호관찰소 학생들 상담도 했었어. 힘들고 외로울때 잡아주고 사랑을 주면 아이들은 반드시 변해. 탈선의 길에서 멀어진 아이들의 재범률도 40%이상 줄었고 전국으로 확산됐지….

자원봉사자의 안전과 인권을 보장해줄 안전망으로 ‘자원봉사활동기본법’ 필요성을 제기한지 10만에 제정되어 2006년 2월 본격 시행됐어. 수해·재난 현장 등을 다니며 경제적으로는 힘들었지만 봉사의 길을 선택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어….

최 :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시군요.

권 : 한번은 보호관찰소의 한풍남 소장에게 연락이 왔어. 포항, 영덕, 울릉, 경주에 있는 1천800여 명의 보호관찰소 학생들을 상담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어. 각계 전문가들을 초청해 집단 상담이나 개인 상담을 하지만 재발 방지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센터에 도움을 요청한 거야. 그 후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2개월간 정식 교육을 했지. 그렇게 수료한 60명의 청소년 상담원을 한 달에 한 번 보호관찰소 학생들과 1 대 1로 연결해 상담을 진행했어.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라고 당부했지. 소외된 아이들의 마음을 끌어안으라고. 그랬더니 상담원들은 아이들이 도망치면 잡으러 가고, 다시 오면 새벽까지 온갖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이들을 끌어당겼어. 아이들은 힘들고 외로울 때 잡아주고 사랑을 주면 반드시 변해. 그렇게 하면 다시 탈선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다는 걸 나는 믿었지. 어렵게 청소년들을 선도해 나간 결과 청소년 재범률이 40% 이상 줄었고 전국으로 확산되었어.

자원봉사활동을 진작시키려면 법에 근거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1990년대 초 자원봉사단체들로부터 제기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4년 하반기에 자원봉사 단체들과 전문가의 노력으로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가 발의한 자원봉사활동기본법이 2005년 6월 국회를 통과했고, 2006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신입 관리자 교육’, ‘자원봉사 바로 알기’, 김인하(성동구자원봉사센터소장), 2012.

최 : 자원봉사활동기본법의 필요성이 제기된 지 10년 만에 제정되었군요.

권 : 자원봉사의 범위와 기본적인 사항 그리고 개념을 확립하고 자원봉사자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지. 현장에서 활동하다가 다쳤을 때 그들의 인권을 보장해줄 법적인 안전망도 필요했어.

최 : 자원봉사활동기본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권 : 2002년 전국 250개 센터의 중앙협회 회장직을 맡았어. 10년 동안 정치적인 문제로 자원봉사활동 기본법을 통과시켜주지 않자 2003년부터 직접 국회에 들어갔어. 이 법과 관련된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이틀이 멀다 않고 찾아갔고, 공청회도 했지. 그리고 2년 가까이 법 제정을 반대하는 기관, 단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자원봉사센터는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고 민간이 투자한다는 설명을 했어. 자원봉사센터를 키워서 정치적인 목적에 쓰지 않겠다며 정치인들을 설득했고, 전국에 있는 자원봉사센터도 거기에 맞는 교육을 해야 했기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 그때 교통비만 6천만 원 가까이 쓴 것 같아. 그렇게 국회를 들락거리니 한 의원이 왜 이렇게 국회에 자주 오냐고 물었어. 그래서 사정을 말하니 이상득 의원을 찾아가 보라고 하더군. 포항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새벽 4시인가 5시였어. 터미널에는 노숙자와 취객뿐이었지. 가장 환한 곳을 찾아보니 텔레비전 앞이었어. 의자에 앉아 이상득 의원에게 할 말을 정리하고 날이 밝자마자 국회로 갔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5분이 채 되지 않았어. 무슨 이야기를 하고 나왔는지도 모르겠어. 그런 절실함 덕분인지 2005년 6월 기본법이 통과되었다고 연락이 왔지. 10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어. 전국에서 모인 자원봉사센터 소장들과 봉사자들이 박수 치고 만세 부르고 난리가 났지.
 

호미곶 한민족 해맞이축전 1만명 떡국 나눔 행사(2012.1.1).
호미곶 한민족 해맞이축전 1만명 떡국 나눔 행사(2012.1.1).

최 : 자원봉사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권 : 2007년 태안반도 기름유출사고야. 세계 해양과학자들이 바다를 다시 살리려면 15년은 걸린다고 했어. 그런데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전 국민이 기회만 있으면 태안으로 왔지. 바위 구멍에 고인 기름을 파내고 부직포로 기름을 걷어냈어. 전부가 한마음이었지. 그렇게 3년 만에 복구되었어. 전 세계가 놀랐지. 기적이었어. 그 기념으로 자원봉사 전국대회를 태안에서 했어. 그 일이 있고 나서 이 길을 선택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어. 솔직히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을 때, 오해와 억측에 시달렸을 때, 내가 선택을 잘못한 것은 아닌지 후회도 했어. 하지만 태풍 수해 현장, 대구 지하철 폭발사고 현장 등 숱한 재난 현장을 다니며 자원봉사자들의 에너지로 세상이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최 : 20년간 자원봉사센터 소장으로 재직했는데,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일하신 비결이 있는지요?

권 : 모든 사람에게는 장단점이 있어. 그런데 단점만 보면 같이 일할 수 없지. 나는 사람들의 장점을 찾아내 주목하고 그것을 살려 그들 스스로 일할 기회를 많이 주었어. 그렇게 신뢰를 쌓아갔지. 또 센터를 운영하면서도 끊임없이 배웠어. 어디든 배울 기회만 있으면 달려갔고. 그런 배움을 통해 젊은 사람들과 호흡하며 에너지를 얻었지.

최 : 자원봉사의 발전을 위해 꼭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권 : 예전보다 자원봉사센터의 필요성과 인식에 대해 많이 개선되었지만 자원봉사센터 직원의 업무는 많고 처우는 열악해 여전히 어려운 점이 많아. 자원봉사센터 운영 지원 지침이 지켜지지 않는 지방자치단체도 많고, 때로는 지침 수준이 너무 낮아서 그 이상으로 예산을 책정하기 어려워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정책과 정치적인 이유로 자원봉사센터의 거버넌스가 안정적이지 못한 경우도 있어. 그래서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예산 비율을 일정하게 확보하여 지방자치단체가 센터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해야 해.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자원봉사센터가 제대로 자리 잡고 지원받는 것이 필요하고.

다섯 번의 인터뷰를 하는 동안 권순남 선생의 휴대전화는 수시로 울렸다. 여든이 넘었는데도 찾는 이가 많다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돕고 함께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마지막 인터뷰를 마칠 즈음에도 전화벨이 울렸다.

최 : 선생님을 찾는 분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권 : 지금 전화한 이는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이상섭 국장이야. 주말에 비가 온다는데 예정된 프로그램을 바꾸는지 묻는군.

최 : 무슨 프로그램인지요?

권 : 자원봉사센터 초기부터 함께한 이들이 있어. 김현옥, 김영남, 안승화, 구자영, 유길준, 박윤애……. 자원봉사기본법의 중요성에 대해 밤낮없이 전국을 돌며 함께 고민하며 의견을 나누는 사람들인데, 내가 퇴직하고 나서는 1년에 한 번씩 모여 여행을 해. 그게 이번 주말이라서 포항에 오기로 했는데 내가 운전을 하지 못하니까 이상섭 국장이 운전과 가이드를 맡기로 했어. 재작년에는 충남 보령에 있는 안성학 소장네에 놀러 갔었지. 나에겐 사람이 재산이야. 인연은 돈으로 살 수 없어. 모두가 마음으로 모이고 진심이야.

최 :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혹시 지금 더 생각나는 분들이 있으신지요?

권 : 20년 가까이 센터를 운영하면서 감사한 사람들이 참 많아. 매년 1월 1일 호미곶에서 떡국 나눔 행사를 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어. 200명 가까운 봉사자들이 전날부터 와서 떡국을 준비하는데 숙박할 곳이 없어. 그래서 대보초등학교 교실에 석유난로 두 개를 켜고 마룻바닥에서 쪽잠을 자. 그분들이 꼭두새벽부터 바람 찬 호미곶에서 달걀 프라이 3천 개를 지지고, 파를 썰어 1만 명의 떡국을 준비하지. 그분들에게 일일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해 미안해.

최 : 앞으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권 : 어떻게 하면 인생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지 고민이야. 나를 내려놓고, 나를 지우는 것, 옷도 버리고 필요 없는 모든 걸 버리는 것. 그러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오랜 기간 나와 자원봉사활동을 한 소중한 이들과 함께 즐겁고 화사하게 죽음을 준비해보려고 궁리 중이야.

권순남

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

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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