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강신규 ⑤
구룡포의 현재와 미래

구룡포항 전경.

1970년대 3만 5천 명이던 구룡포 인구는 현재 7천여 명으로 크게 줄었다. 만선의 풍족함을 선사하던 바다는 어족 자원이 고갈되었다. 강신규 선생과의 인터뷰는 바다에 대한 걱정으로 흘러갔다. 선생과 구룡포 골목을 걸으며 과거의 유산과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선생은 두세 걸음마다 멈춰 주민들과 인사했다.

 

눈앞 이익 보다 바다부터 관리해야 해, 온갖 쓰레기를 몰고 다니는 조류가 있어

항구에 오래 정박된 FRP 폐선은 썩지도 않고 화학 약품 때문에 바다가 오염되지

우리나라 방파제는 너무 높아 파도가 넘나들수 없으니 크릴새우도 고래도 없어

선박도 생태계도 살리는 해법으로 다음세대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봐

배 : 골목을 거닐면 과거의 풍경이 겹쳐 보이겠습니다.

강 :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구룡포는 전성기였어. 어황도 좋았고 인구 유입도 많았지. 셋방 하나에 두 식구가 살았을 정도였어. 근대역사문화거리에 있는 버스터미널(현재 구룡포길 85-1 인근)에서 대구와 감포, 부산까지 다녔지. 근처에 버스 안내양과 운전기사가 묵었던 여인숙이 아직 남아 있어. 그만큼 경기가 좋았지. 수도가 없을 때라 대구에서 수돗물을 공수해 아이들 분유를 데워 먹였어. 식수는 구룡포교회 뒤쪽 우물에서 길어다 먹었고.

배 : 근대문화역사거리에는 누가 살았나요?

강 : 근대문화역사거리 입구를 바라보고 오른쪽 도로가에는 배를 수리하는 철공소가 많았어. 근대문화역사관 앞 골목은 부자들이 모여 살았지. 구룡포 근대역사관은 일본인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 선박을 운영하며 구룡포어업조합 감사로 활동)가 지은 집인데, 광복 후에 수산업계의 거부(巨富)였던 고치원 씨가 살았어.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그분은 일찍 망하려면 수산업을 하고 늦게 망하려면 교육을 하라고 했지.

 

구룡포 조선인 시장 /손장원 제공
구룡포 조선인 시장 /손장원 제공

배 : 구룡포에도 빈부의 차가 컸나 봅니다.

강 : 구룡포시장과 구룡포초등학교 앞은 모래사장으로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었어. 강원도에서 먹고살려고 온 어부가 많았지. 동부초등학교(현 아라예술촌) 너머 용주리(현 구룡포 6리)는 특히나 가난했어.

배 : 선생님은 어릴 때 구룡포에서 눈에 띄는 아이였겠군요.

강 : 항상 누구 집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부친 귀에 여과 없이 들어가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아버지는 늘 바빠서 교회나 가야 볼 수 있었어. 내 아들도 강두수 손자라는 말을 듣고 자랐고. 손녀들은 아버지를 왕할배라 부르며 따랐지.

배 : 가업을 물려받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강 : 아버지 그늘에 들어가기 싫었어.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서울 구로 3공단(현재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완구진흥공단에서 근무했어. 당시 완구 수출이 활발했는데 봉제완구를 솜이 아니라 짚으로 채우는 황당한 불량품이 쏟아졌지. 공단이 품질을 보증한 제품만 수출하는 시스템이 된 거야. 구룡포로 돌아와 수협에 잠깐 근무하다 다시 서울로 가서 장로회신학대학 학생과에서 일했어.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이었는데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자 그 분위기가 싫어 다시 고향으로 왔지.

배 : 수산업 관련 일은 전혀 안 하셨나요?

강 : 오징어 조미 가공업과 어선 운영을 잠깐 했어. 꽁치 배는 처가 도움을 받아서 하다가 1년여 만에 접었지. 손발이 맞는 선원을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 뱃일을 천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뱃님’이라 불러야 해. 선원 구하기가 그렇게 힘들어. 결국 1990년대에 아버지 그늘로 들어가 냉동공장 사업을 했지.

배 : 강두수 선생은 포경업을 접고 어떤 일을 하셨나요?

강 : 포경업은 1980년대 초반에 끝났어. 그즈음 장생포의 백경호 선주가 아버지에게 배로 돈 벌어 하늘에 다 보낸다고 했어. 고기를 잡아도 선박 기름값 대면 남는 게 없었거든. 1986년 법적으로 포경이 중단되면서 일부는 연근해 어업 등으로 업종을 바꿨고, 우리는 폐선을 했어. 다른 허가를 받아봐야 쓸데없다고 본 거야. 고래잡이는 하지 못했지만 쥐치와 꽁치, 명태 등을 잡았어.

배 : 1990년대에 포경선 수입을 알아보기도 했다고요?

강 : 김대중 정부 시절, 고래 자원 조사가 시작되었어. 고래 자원 실태를 파악하는 시험선 신청을 받았지. 그때 포경 관련 자료가 필요해 찾아봤는데 거의 없더라고. 동네 사진관에 걸린 귀신고래 사진을 찍어서 올렸지. 그때 일본에서 포경선을 수입하려고 실제로 알아보기도 했어.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의 포경 금지로 중단된 이후 학계 차원의 고래 자원 조사가 이어지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첫 고래 자원 조사가 시작되었다.

국립수산진흥원은 “그동안 2차례에 걸친 고래 자원 조사를 근거로 한국 연안에 서식하고 있는 고래를 조사한 결과, 긴부리 참돌고래 6만여 마리, 짧은부리 참돌고래 2만 2천여 마리, 밍크고래 2천500여 마리 등 8종 11만여 마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해양부는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내년 6월 호주에서 열리는 국제포경위원회(IWC)에 보고, 상업 포경 재개를 위한 근거 자료로 활용할 방침이다.

<‘고래 11만 마리 동·남해 서식 추정’, ‘경향신문’ 1999년 7월 13일>

배 : 냉동공장 사업은 어땠습니까?

강 : 정부 지원 대출을 받아 호미곶 강사 2리에 냉동공장을 지었어. 완공이 늦어지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지. 건축업자를 잘못 만난 데다 완공 직전에 화재까지 났어. 상환일은 다가오는데 이자 갚기도 힘들었어. 그 사업으로 가세가 기울었지.

배 : 강두수 선생이 1998년 4월 7일 작고하셨습니다. 그때 상황을 말씀해 주시지요.

강 : 심장 질환으로 선린병원에서 6개월간 입원해 계시다가 돌아가셨어. 선린병원 김종원 원장과 친분이 있어서 몸이 불편한 이웃들을 선린병원으로 많이 모셨다고 들었어. 너희 아버지 덕에 살았다는 어르신도 있었고. 결국 당신도 선린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셨지.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어. 나도 자동차에서 숙식하면서 병시중을 했고. 아버지는 장로로 기억되기를 원하셨지.

 

구룡포 중심가. /손장원 제공
구룡포 중심가. /손장원 제공

배 : 지금 어선의 사무장을 맡고 계시지요?

강 : 어선의 조업을 뭍에서 돕는 역할이야. 출항에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어획물을 경매시장에 판매하지. 새로 충원된 외국인 선원의 정착을 돕기도 해. 얼마 전 베트남에서 나이 어린 선원이 와서 간단한 세간 장만을 도왔지. 말이 안 통해서 소통하느라 혼났네. 과거에는 중국인이 많았다면 요즘은 베트남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많이 와. 바다 일이 워낙 힘들어서 그런지 오래 견디는 선원들이 많지 않아.

배 : 구룡포항에 정박한 배가 많은데 조업 상황은 어떤가요?

강 : 조업 나가는 배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기름값과 인건비를 감당하는 것 같아. 강풍이나 풍랑주의보가 뜨면 배는 쉬지만 선원들 월급은 지급해야지. 대게 값이 좋을 때는 선주도 돈을 벌지만 나머지는 별로야. 비용을 아끼려고 선주가 선장을 겸하는 ‘자배 자선장’을 하거나 외국인 선원을 고용하고 있어.

배 : 어업 종사자로서 관계기관에 건의할 사안이 있으신가요?

강 : 당장 눈앞의 이익을 쫓기보다 바다부터 관리해야 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다에 쓰레기를 휘몰고 다니는 조류가 있어. 육지의 쓰레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온갖 것들이 뒤엉켜서 흘러 다녀. 잘 가던 선박의 속도가 갑자기 떨어지면 대부분이 쓰레기 조류를 만난 거지. 항구에 오래 정박된 폐선도 문제야.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 어선은 썩지도 않고 화약약품 때문에 바다가 오염되지.

배 : 지속 가능한 어업을 위한 고민이 필요하겠습니다.

강 : 우리나라 방파제는 너무 높아서 물의 흐름을 막아. 일본처럼 방파제를 낮게 해서 파도가 넘나들 수 있도록 해야 해. 해류가 항만을 돌아야 크릴새우가 모이는데 지금은 방파제가 해류를 막으니 크릴새우도 고래도 없지. 선박도 안전하고 생태계도 살리는 해법을 찾아야 해. 선장들의 말을 들어보면 구룡포는 지금이 IMF야. 오징어나 홍게가 끊임없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 휴식년을 지정해서 어자원을 보호하고 바다를 청소하는 정책이 마련되어야 해. 이런 식으로 잡기만 하면 안 돼. 구룡포의 다음 세대를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봐.

강신규

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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