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강신규 ④
무속의 시대에 교회를 개척하다

구룡포 교회.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어촌에는 무속신앙이 강하다. 예측 불가능한 바다에서 일하려면 무속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신규 선생의 집안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줏단지를 깨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사업을 일으킨 뒤에는 지역 교회를 개척하는 데 앞장섰다. 설립 100주년을 앞둔 구룡포교회(2011년 늘푸른교회로 명칭 변경)와 구룡포의 신앙에 관해 들어보았다.

배 : 해안 지역은 무속신앙이 강할 수밖에 없었지요?

강 : 바닷가에는 샤머니즘이 강해. 바다 일은 사람의 힘으로 안 되니까. 특히 바람을 다스리는 영등(영두)할머니를 끔찍하게 섬기지. 영등할머니가 딸을 데리고 오면 바람을 일으키고, 며느리와 함께 올 때는 비가 내린다고 해. 다시 태어나도 영등을 통해야 하고, 아들도 점지해준다니 섬길 수밖에. 당시만 해도 배는 남자들만 타는 전유물이었어. 출항 전에 여자가 어선에 오르거나 그물을 밟으면 안 된다고 했지.

배 : 지금도 예전 풍습이 남아 있지요?

강 : 새해 첫 수산물 거래를 앞두고 초매식(初賣式)을 해. 처음 매매하는 생선으로 제상을 차리고, 수협 조합장과 이사들이 절을 하고 풍어와 무사 안녕을 기원하지. 매년 이어지는 풍습이야. 그리고 풍어제도 있어. 용왕당에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지내지. 올해도 어황이 안 좋으니 동네에서 무당을 불러 1박 2일 굿을 했어. 등록된 무속인이 와서 전복과 해삼, 성게도 많이 잡고 어촌계원들의 안전을 빌었지. 예전에는 선박이 나갈 때마다 고사를 지냈어. 무속인이 와서 징을 치고 축수(祝手)를 했지. 부친이 교회 장로여서 굿을 못 하게 했지만 선원들은 가만있지 않았어.

 

초매식·풍어제·고사 등 바닷가는 샤머니즘 강해 선주도 못 말리고 목사도 못 말려

1925년 구룡포 교회가 설립되고 대구동산기독병원 박덕일 초대목사가 파견됐지

대구고등성경학교 다녔던 부친은 1955년 장로 임직 베풀기 즐겨 기부도 많이 해

전도사들 학비까지 대주며 두 팔 걷어붙이고 교회에 헌신 ‘강두수 교회’라 불리기도

초기엔 가마니 깔고 예배를 드렸지만 교세 확장되면서 인근에 여러교회 세워져

교인들이 직접 지은 상정교회·장길리교회·석병교회·삼정교회 등 개척에 큰 보탬

배 : 선주도 굿을 말리지 못했군요?

강 : 목사까지 와서 무속을 금했지만 선원들은 듣지 않았어. 바다에 생명을 맡겨야 하는 선원들로서는 오랜 믿음을 깨기가 쉽지 않았던 거지. 고기잡이를 나가는 선원들은 포항이나 발산, 흥안으로 배를 옮겨 무당을 불러서 고사를 지내고 출항했어. 그렇게까지 하는데 별수 있나. 부친이 경비는 보낸 걸로 알아. 교회는 날씨가 좋아도 일요일에는 출항을 금했지만, 선원들은 그럴 수 없었지.

배 : 선원들은 생계가 걸린 일이니 물러서지 않았나 봅니다.

강 : 그렇지. 생계 때문에 날씨만 좋으면 바다로 나가야 했지. 포경선 선원들은 흥안리와 발산리에서 걸어왔어. 후동리에 있는 하수종말처리장을 지나 산길을 넘었지. 지금이야 등산로라도 있지. 당시엔 빨리 걸어도 두 시간 걸리는 거리를 새벽에 걸어왔어.

배 : 교회에 다니는 선원은 없었나요?

강 : 한때 동해에서 장어가 엄청나게 잡힌 적이 있는데 발산리에 있는 작은 교회에 교인들의 헌금이 1억 원이 넘었다고 해. 예배를 보고 나가면 사고도 안 나고 고기도 잘 잡힌다는 소문이 돌자 신도가 많아진 거지.

배 : 강두수 선생이 교회에 헌신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강 : 대구고등성경학교(1919년 개교 당시는 ‘대구동산 성경학교’라 불림)를 다녔으니 말해 뭐해. 이 학교의 교육 목표가 장래 교회 인도자 양성이라고 하더군. 아버지가 1955년에 장로가 되시고 나서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어. 부친은 베풀기를 즐겨 기부를 많이 했어. 상정, 장길리, 석병 등에 교회를 개척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지. 아버지를 비롯해 신도들이 흙을 나르며 물심양면으로 도왔어.

배 : 구룡포의 교회 역사가 100년이 다 되어 간다고 들었습니다.

강 : 1925년에 구룡포교회가 설립되었지. 연혁을 보면 대구 동산기독병원에서 박덕일 목사를 파송해 설립했어. 용주리에 초가 세 칸 예배당으로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제대로 된 건물이 없어서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봤다고 해. 광복 후에는 구룡포 5리에 있던 일본인 사찰을 인수해 예배를 봤지.

구룡포교회는 일제강점기 대구 동산기독병원(동산의료원)에서 조직된 전도회를 통해 개척되었다. 동산의료원 선교사들이 건립한 교회는 대구·경북에 100개가 넘는다고 전한다. 동산기독병원 전도목사였던 박덕일 목사는 구룡포교회의 초대 목사로 파송되었다.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제2대 플레처 원장은 부임 후 전도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그는 우리말이 서툰 선교사들보다 현지인이 전도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크다고 생각하고 박덕일(1930년까지 시무) 목사를 1921년 1월에 동산기독병원 전도목사로 임명했다.

전도회 최초 개척교회는 1921년 11월에 박덕일 목사가 개척한 고령군 덕곡면 반성교회이며, 병원 전도회가 147개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하나 기록상으로는 127개 교회로 되어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 교회 가운데 대구 시외에 있는 교회는 영천금교회, 구룡포교회, 경주아화교회, 청도신읍교회, 장기교회, 건천제일교회, 칠곡동명교회 등이다.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블로그 “다시 보는 동산 역사 : 1921년 ‘동산 기독병원 전도회’ 설립,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

 

구룡포교회 부설 유치원 성탄행사(1961). /정재원 제공
구룡포교회 부설 유치원 성탄행사(1961). /정재원 제공

배 : 구룡포교회를 구심으로 인근에 여러 교회가 세워졌다고요?

강 : 교회에 큰 종탑이 있었는데 종소리가 온 동네로 퍼져 나갔어. 새벽 4시에 종소리가 울리면 배 나갈 시간으로 알았으니까. 구룡포교회가 ‘어머니 교회’가 되어 인근 지역으로 교세를 확장했어. 1960~70년대 신도는 300명에 가까웠어. 인구가 3만 5천 명 정도 되던 때지. 어려운 시절이지만 십시일반으로 서로 도왔어. 1990년대 이후 교세가 점차 약해졌지.

배 : 교인들이 예배당을 짓는 사진이 있군요.

강 : 교인들이 모래와 자갈을 옮겨가며 건물을 지었지. 교인들의 인력 봉사로 1949년 상정교회, 1953년 장길리교회, 1961년 석병교회, 1979년 삼정교회가 설립되었어. 교회를 개척하는 일 자체가 포교였고 신앙생활이었던 거지. 부친은 교회 일이라면 두 팔을 걷어붙였어. 전도사들 학비도 대주었다고 해. 사업이 기울던 1990년대는 빚을 내 헌금했을 정도야. 교회에 그렇게 애정을 쏟으니 구룡포교회를 강두수 교회라고 말하는 교인도 있었어.

배 :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교회 풍경이 있나요?

강 : 어머니가 교회에 가서 고무신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아이들이 많았어. 그때 사진이 있는데 워낙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어 내가 나를 못 찾겠어. 1948년에 구룡포교회 부설 유치원이 설립되었는데 나도 거길 다녔지. 아버지가 그 유치원을 설립할 때 자금을 대셨고 초대 원장을 맡은 걸로 알아.

배 : 유치원에 다닐 때 추억이 있나요?

강 : 당시엔 두세 살 차이가 나는 아이들과 함께 유치원을 다녔어. 홍역이나 천연두가 무서웠던 시절이어서 아이가 태어나도 어느 정도 자라서야 호적에 올렸거든. 찾아보니 내 사진은 남아 있는 게 없는데 친하게 지내는 후배 사진은 있더라고. 원복을 맞춰 입은 모습을 보면 여유 있게 잘살던 시절이다 싶어. 다른 기록은 2011년 교회를 신축하면서 거의 사라졌어. 당회록도 1940~50년대 기록은 소실되었어.

배 : 강두수 선생은 교육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강 : 구룡포 수산고등학교에 교육용 선박을 기증했어. 연안에서 운항 기술을 가르칠 저인망 실습선이었어. 20~25t 어선이 대부분이던 시대였지만 실습선은 30t 넘는 목선이었어. 구룡포수협조합장을 할 때 기증하셨을 거야. 실습을 안 할 때는 외삼촌이 속초로 몰고 나가 고기를 잡아왔어. 아버지는 나한테 교육자가 되고 싶지 않은지 물어보셨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어.

배 : 기증한 선박은 실습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겠습니다.

강 : 그랬을 테지. 구룡포 수산고등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있었는데 실력이 꽤 좋았어. 성적은 뛰어나도 타지로 갈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는 친구들이 수산고로 진학했지. 수산고등학교 항해과를 나와서 부산 해양대학을 거쳐 상선을 모는 선장도 배출되었고. 내가 대학 다닐 때 원양어선을 타고 제법 큰돈을 버는 친구도 있었지.

강신규

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