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강신규 ③ 구룡포수협의 서막을 열다

구룡포극장(허치권 작 1964) /김진호 작가 제공

어업인들은 그들만의 단단한 조직력을 자랑한다. 수산 단체는 거친 바다에서 서로의 생명을 보호하고 불법 어로와 과잉 조업으로부터 어족 자원을 관리하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구룡포 지역 어업인들의 구심점인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2년 설립된 구룡포어업조합에서 출발해 1962년 수산업협동조합법이 공포·시행되면서 구룡포어업협동조합이 공식 발족했다. 지금과 같은 협동조합 시대가 열린 것이다. 치열한 선거를 거쳐 강두수 초대 조합장이 취임했다.

 

1962년 수산업협동조합법 시행되고 구룡포어업협동조합 공식 발족
인사·재정권 총괄하는 초창기 조합장 권위는 구룡포 읍장보다 높아
‘조합장 선거에 나가면 기둥뿌리 뽑힌다’ 소문 매수자금 횡행하기도
1960~70년대 개도 돈 물고 다닌다는 시절, 술집 즐비 극장도 두 개나
‘미워도 다시 한 번’ 다닥다닥 붙어서 보고 통행금지 속 걸어서 집으로

배 : 부친께서 구룡포수협 초대 조합장을 지내셨지요?

강 : 구룡포수협은 호미곶과 구룡포, 장기 일원을 업무 구역으로 하고 있어. 동해안 최대의 어업 전진기지를 관할하지. 아버지는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어. 정확한 임기를 몰라서 수협에 확인해보니, 1대 임기는 1962년 4월부터 1965년 3월 9일까지, 3대는 1968년 4월부터 이듬해 8월 20일까지였어.

배 : 구룡포수협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요?

강 : 구룡포수협의 모태는 일제강점기에 있던 ‘어업조합’이야. 줄여서 ‘어조’라고 했지. 엄격하게 말해 수협은 아니지만 어민들의 자조(自助) 단체 역할을 했고 수협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어.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에서 공원으로 가는 돌계단 끝에 일본인 공덕비가 있잖아. 일제강점기에 신사(神社)가 있던 자리로, 현재는 6·25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사당이 있어. 공덕비 주인이 어업조합을 설립했지.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에서 공원으로 가는 가파른 돌계단 끝에 이름이 지워진 비석이 있다. 광복 후 시멘트로 덧입힌 공덕비의 주인인 도가와 야사브로(十河 彌三郞)가 구룡포어업조합의 창립자다.

구룡포수협은 역사를 거슬러 어업조합까지의 연혁을 따진다면 1922년 11월 9일 일본인 도가와 야사브로에 의해 설립되어 구룡포, 병포, 삼정, 석병, 강사, 호미곶 등 현재 지역의 북쪽 6개 마을로 출발했다. 도가와 야사브로는 구룡포어업조합을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조합장이 되었는데, 구룡포 근대사를 이야기하면서 그를 빼놓기는 어려울 정도로 구룡포 일본인의 중심인물이다.

한편, 일반적으로 수협으로 약칭되는 수산업협동조합 조직은 1962년부터를 말한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착수되면서 정체 상태에 있던 수산업도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 시기다. 구룡포어업조합을 대신해 협동이라는 이름의 구룡포어업협동조합이 공식 발족했고 강두수 초대 조합장이 취임했다.

<‘구룡포수협사’,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 2016, 132쪽·351쪽>

배 : 수협 초창기의 조합장 권위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강 : 대단했지. 구룡포 읍장보다 높았으면 높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거야. 돈을 취급하는 곳이니까 힘이 있었지. 구룡포 전체 수입원의 80%가 구룡포수협에서 나왔어. 수협 직원도 선망의 직업이었고. 수협 판매과장에게 중매인들은 꼼짝 못 했어. 누구에게 물건을 판매할지를 결정했거든. 판매과장의 권한이 그 정도였는데 인사권을 가진 조합장은 어떻겠어? 어족 자원이 풍부할 때니까 권한이 정말 대단했지. 행사장을 가도 단상의 자리 배치부터 달랐어. 행정기관에서 공무원들끼리 치르는 행사보다 조합장이 초청받는 행사가 더 성대했지. 조합장은 인사권뿐 아니라 재정권도 있었으니까.

배 : 재정권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권한인가요?

강 : 조합장이 수협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결재권을 가졌어. 그때는 어황이 좋아서 선박에서 나오는 수수료가 어마어마했거든. 우뭇가사리(천초)와 해조류, 전복, 해삼이 많았는데, 어촌계에서 나오는 수입도 수협에서 관리했어. 어획물을 잡거나 채취해서 타지로 반출하려면 수협에 수수료를 지불하고 전표를 끊어야 했지.

배 : 전표 없이는 본인의 어획물을 팔지 못했다고요?

강 : 수협에서 초소를 만들어 관리했어. 당시 구룡포로 오가는 길은 비포장도로 하나뿐이었거든. 구룡포로 들어오고 나가는 양쪽에 초소가 하나씩 있었어. 초소를 통과하려면 전표가 있어야 했지. 원칙적으로 불법 반출이 불가능했지만, 뒷돈을 주고 뒤로 빼돌리는 일이 흔했어.

배 : 일본으로 수출도 많이 했다고요?

강 : 우뭇가사리와 성게는 전부 일본으로 수출했어. 오퍼상들이 와서 공동구매를 했지. 두원리에서 대동배까지 어촌계에서 나오는 수산물을 모두 쓸어갔어. 그때부터 일본은 기르는 어업으로 갔던 거야. 우리는 어자원 보호라는 개념이 없으니 어린 운단(말똥성게)과 성게까지 돈만 되면 모조리 팔았어.

배 : 조합장의 권한이 크니 선거 역시 치열했겠습니다.

강 : 1960년대는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가 성했지. 조합장 선거도 마찬가지였어. 초대부터 3대 조합장 선거는 대의원이 했거든. 어촌계원들이 뽑은 대의원들이 투표권을 가지는 방식이야. 대의원이 20여 명이었으니까 대의원을 납치한다고 했을 정도로 대의원 쟁탈전이 치열했어. 조합장 선거에 나가면 기둥뿌리 뽑힌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지. 아버지는 선거와 관련해 가족들과는 상의 한마디 없이 출마 사실만 통보했어.

전국적으로 조합장 선거가 과열되자 조합장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두되었다.

당국이 비공식으로 추산한 매표 자금은 3천만 원선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M특수조합에서는 200만 원이 총대(총회 대의원) 매수 자금으로 뿌려졌다고 관계자는 말하고 있다. 당국자들은 이번에 실시했던 조합장 선거가 전례 없이 무질서했으며 매표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일부 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라고 개탄하고 있다. 관계 당국은 조합장 선거가 이처럼 타락한 것은 수산 금융의 대폭 확대에 따라 수산 자금의 배정 등에 조합장의 재량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 조합장의 권한을 축소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협조합장 선거 당선 무효 사태’, ‘경향신문’ 1968년 3월 27일>

 

일제강점기의 구룡포어업조합 /손장원 제공
일제강점기의 구룡포어업조합 /손장원 제공

배 : 부친의 상대는 누구였습니까?

강 : 2대 조합장이 된 문용화 씨였어. 당시 농촌에서 소달구지가 있으면 부자라고 한 것처럼 어촌에서는 어선이 있으면 부자라고 했지. 6대 조합장까지는 모두 어선을 소유한 선주라고 알고 있어. 꽁치며 오징어며 어족이 풍성하던 시절이었지. 지금은 수산업 수입이 줄고 금융 쪽 수입이 많아. 내가 근무하던 1980년대에 법이 개정되면서 조합장 직선제가 도입되었지.

배 : 부친이 조합장을 지낸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가 구룡포의 전성기였지요?

강 : 그랬지. 지금 구룡포 인구가 7천 명 정도인데, 당시는 3만 명이 넘었어. 배만 타면 돈이 생기니 술집이며 기생집이 수두룩했지.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시절이었어. 추운 날에도 술에 취해 길바닥에 자는 사람들이 흔했지. 구룡포길 153번길은 ‘산가쿠마치’라고 불리는 술집 거리였어. 가파르고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낡은 집들이 모두 요정이었지. 구룡포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선원들이 찾는 술집이 많았어. 여자들이 한복을 입고 조명 아래 줄을 서 있었지.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지만 불을 켜놓고 술장사를 했어. 그 시절 구룡포에는 극장이 두 개나 있었어.

배 : 지금도 없는 극장이 50년 전에 있었다고요?

강 : 극장이 두 개 있었는데 부친이 인수해서 외삼촌이 경영했어. 우리 쌍둥이 형제가 돈통을 하나씩 맡아 용돈벌이를 했지. 영화관이었지만 쇼단과 서커스단도 왔는데, 공연을 앞두고 관객 몰이꾼이 북을 치고 돌아다니며 홍보했지. 극장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마트와 호텔이 들어섰어. 마트 자리 규모가 컸는데, 낡은 간판이 아직 남아 있지.

배 : 극장에서는 어떤 영화를 상영했나요?

강 : 기억이 다 나지 않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인기는 당시에 최고였어. 좌석이 부족해서 통로 계단이나 바닥에도 관객이 빼곡했어. 여름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다닥다닥 붙어 서서 봤지. 영화를 보려고 호미곶, 양포, 흥안, 발산에서 두세 시간씩 걸어왔어. 통행금지가 있었지만, 영화가 끝나면 또 밤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지.

배 : 필름은 어떻게 배급받았나요?

강 : 대구의 배급사에서 버스로 필름 통을 받았어. 영사기에 걸어서 2, 3일간 상영하고 다른 걸로 바꿨지. 흑연을 태워서 반사경에 빛을 비추는 ‘카본식 영사기’였는데, 초점이 멀어지면 관객들이 안 보인다며 소리치고 그랬지.

배 : 당시 구룡포의 거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겠군요.

강 : 그런 셈이지. 영화가 히트하면 배우들이 와서 쇼를 하기도 했어. 한창 인기를 누렸던 태현실과 액션 영화 ‘9인의 해병’에 출연했던 황해, 최무룡도 극장에 왔어. 배우들을 보려고 관객이 구름처럼 몰렸지. 배우들이 와서 노래를 불렀는데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인기였어.

배 :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가까이서 보셨겠어요.

강 : 식사도 같이했지. 포항에 왔다가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구룡포에서 하루 더 공연하던 식이었어. 숙박 시설이 여의치 않으니 여인숙에서 잠을 잤는데 주연만 방을 따로 주고, 다른 스텝들은 한방에서 묵었어. 바깥에서 아무렇게나 자기도 했으니 비 오는 날을 싫어했지. 수익은 손님 수를 계산해 극장과 기획사가 나눠 가졌어.

강신규

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