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강신규 ② 구룡포 포경 역사 쓴 강두수

포항시 구룡포읍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전시된 제1 동건호. 강신규 선생의 고종사촌인 김건호 씨가 기증했다.

동해의 다른 이름은 ‘고래 경(鯨)’을 쓴 ‘경해(鯨海)’다. 옛 문헌에는 동해를 ‘경해(鯨海)’로 표기한 사례가 적지 않다. 고래잡이는 조선시대까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포경선이 동해로 진입하면서 거침없이 진행되었고 결국 일본이 독차지했다. 한국인의 본격적인 포경은 광복 이후 시작된다. 포항과 구룡포의 고래잡이는 1951년 구룡포 강두수의 해승호(海勝號)가 제1호 허가를 받으며 시작되었다. 그렇게 구룡포항은 고래잡이 어항으로 변모했고, 장생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 포경의 원조가 되었다.

 

아버지의 포경업은 광복 즈음 일본인의 포경선을 받아 시작
정식 허가 받은 것은 해승호야… 1951년 ‘허가 1호’로 취득
구룡포항은 장생포와 더불어 한국 근대 포경의 원조가 됐지

우리나라 포경업은 1970년대 중후반에 최고 어획고를 올려
구룡포항 고래잡이 아버지는 읍내 손꼽히는 부자가 됐어
길이 5m 고래 한 마리 값이 50만원… 하루 한 마리씩 포획

포경선원은 고급 인력… 고래 첫 발견자에 월급 15% 더줘
고래기름은 드럼통에 담아 팔아… 화장품 원료로 쓴다더군

배 : 선생이 태어난 1947년에 촬영한 사진인데 한국 포경사에 기록될 만한 자료를 소장하고 계시더군요.

강 : 1947년 12월 24일 영어호(永漁號)가 39자나 되는 귀신고래를 포획한 기념사진이야. 39자면 11.8m나 되지. 사진 아래에 ‘강두수 씨 포경선 영어호 귀신고래 포획 기념’이라고 적혀 있어. 구룡포항 남방파제 옆에 있는 수협 탱크 자리일 거야. 몸집이 워낙 큰 고래라 구룡포항에 둘 자리가 없어서 방파제에 올린 거지. 동해에서 포획된 마지막 귀신고래라고 들었어. 사진 속에 아버지는 안 계시고 큰아버지가 계셔.

배 : 큰아버지도 포경업에 종사했나요?

강 : 큰아버지는 안 하셨고 아버지가 포경선 세 척을 운영했어. 나도 사진처럼 큰 고래를 본 적이 있어. 구룡포항까지 끌어오지 못하고 병포리 조선소에 올려놓은 걸 봤지. 조선소에서 반을 해체하고 나머지는 위판장으로 가져와서 작업했어. 고래 둘레가 어른 키보다 컸으니 어마어마했지. 고래는 힘이 좋아. 한번은 호미곶에 주둔하던 미군이 지나가다 돕겠다고 나선 적이 있는데, 고래가 꼬리를 치니까 군용 지프도 뒤로 밀리더라고.

배 : 강두수 선생이 포경업을 시작한 것은 언제였나요?

강 : 광복 즈음에 일본인에게 포경선을 넘겨받아 시작했다고 들었어. 정식 허가를 받은 것은 1951년 해승호야. 1935년에 건조된 제9영어호와 1953년에 건조된 제13영어호도 있었는데 모두 목조선이었어. 1972년에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는 퇴출되었지만 해승호는 남아 있었어. 그 밖에도 꽁치 배가 2척 더 있어서 흑산도까지 가서 조기와 꽁치를 잡았어. 아버지는 포경선으로 시작해서 다양한 사업을 일궈내셨지.

포항의 포경업이 강두수에서 시작되었음은 ‘포항시사’에서도 확인된다.

포항 지역은 울산 방어진과 더불어 포획 고래두수가 많아 고래어장이 성업을 이루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구룡포 근해에 고래 어장이 형성되어 강두수의 해승호가 1951년 12월 20일 허가를 득하여 포경업을 시작한 사실이다. 그 후 주길호, 제9영어호 등을 투입하여 구룡포항을 고래잡이 어항으로 변모시켰다. 포경허가번호 1호, 2호, 3호는 구룡포에 소재하였는데 우리나라 근대 포경의 원조라 할 만큼 이 지역의 포경업이 발달했다.

<제3장 수산업, 포항시사, 포항시, 2010, 419쪽>

배 : 목조선으로 그 큰 고래를 잡았다는 얘기인가요?

강 : 목선에 망통(고래를 찾기 위한 전망대)과 총을 설치해 포경선으로 썼다고 들었어. 포경선은 모두 구형 동력선이었지. 지금과 같은 디젤 엔진이 아니라 소구기관 엔진(이른바 ‘야키다마’라고 한다)을 사용했어. 먼저 열을 가하는 과정이 필요한 엔진이지. 디젤 엔진으로 교체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들어서야. 처음에는 운전할 줄 몰라 애를 먹었지.

우리나라 포경업은 1960년대 중반부터 포획 두수가 증가해 1970년대 중후반 최고의 어획고를 올렸다. 1976년 8월 28일 자 ‘경향신문’에 당시 50대인 강두수의 인터뷰가 실렸다.

구룡포항에서 27년간 고래잡이만 했던 강두수 씨(58)는 지금은 읍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다. 20t급 부경호로 잡은 고래만 수백 마리라고 자랑한다. 길이 5m 정도의 고래 한 마리가 50만 원 정도, 운 좋은 날이면 아침나절 출항하여 어둡기 전에 1마리를 잡는다.

<‘해풍 따라 마을 따라-구룡포’, ‘경향신문’ 1976년 8월 28일>

배 : 포경선을 타본 적이 있나요?

강 : 학창 시절 포경선을 타고 바다에 나간 적이 있어. 할머니가 배를 타면 안 된다고 야단쳤지만 삼촌에게만 귀띔하고 몰래 탔지. 어린 나이의 호기심이었어. 선박에는 아무나 안 태우거든. 누가 멀미라도 하면 신경이 그리로 쏠리니까. 포경선은 당일 돌아오니 슬쩍 다녀오곤 했지. 어선에서 먹는 밥은 짭조름했어. 식수가 귀한 시절이라 바닷물로 먼저 쌀을 씻고 나서 민물을 넣어 앉혔거든. 목선이지만 장작불을 피워 밥을 지었어. 연기가 얼마나 나는지 조리장 얼굴이 시커멓게 되었지. 파도가 센 날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면 다리가 뻐근했어.

배 : 포경선에는 누가 탔나요?

강 : 포수와 선장, 갑판장과 기관장, 조리장 등 대개 예닐곱 명이었어. 선장이 망통에 올라가 고래가 있는지를 살폈어. 체구가 작고 재바른 나도 망통에 올라가서 구경했지. 고래를 잡으려면 선장과 포수의 호흡이 중요해. 고래는 수면 바로 아래로 다니는데 윤슬과 구분이 안 되거든. 고래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해. 고래를 잘 보는 이들은 시력이 탁해진다고 술도 안 먹었어. 고래를 발견하면 ‘눈값’도 받았지. 포경선은 아무나 못 탔어. 포경선 선원은 고급 인력에 속했지. 그래서 다른 배를 타다가 포경선에 태워달라고 사정하는 선원도 있었어. 새벽에 나갔다가 해가 빠지면 돌아오니 일하는 시간도 좋고. 그때는 주로 대보와 감포까지 나가서 고래를 잡았어. 구룡포 해안선을 따라 귀신고래가 자주 출몰했지.

일명 ‘눈값’의 구체적인 액수는 포경선 선원이던 고(故) 김복엽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고래를 잘 찾아내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명포수만큼이나 대우를 받았다. 선원들의 월급은 육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비슷했지만 고래를 잡는 성과에 따라 돈을 더 받을 수 있었다. 고래를 처음 발견한 사람에게는 월급의 15%를 얹어줬고, 1마리를 잡을 때마다 월급의 10%에 해당하는 돈을 추가로 더 받았다.

<‘4장 해방 후의 수산업과 어업조합’, ‘구룡포수협사’,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 2016, 246쪽>

배 : 고래를 포획하는 장면도 보셨나요?

강 : 포경선은 총포 허가가 있어야 해. 대포로 작살을 쏴 고래를 잡았어. 촘촘한 금 저울에 화약을 부어 작살을 쏘았지. 작살 촉이 고래 살에 박히면 자동으로 날개가 펴져 빠지지 않았어. 창끝은 고래의 심장을 향해 있었지. 바다도 땅처럼 딱딱해서 작살을 사선으로 쏘아야 해. 위에서 바로 꽂으면 작살이 구부러지지.

배 : 구룡포에서 고래가 많이 잡혔던 이유는 뭘까요?

강 : 만(灣) 지형에 크릴새우가 많아서야. 크릴새우가 지나가는 길목에 고래가 몰려들었지. 물을 들이켰다 크릴새우만 남기고 뱉는데, 크릴새우가 풍부하니 고래 살집이 좋았지. 당시는 고래가 해안 가까이에서 잡혔기 때문에 포경선에서 육지가 보였어.

배 : 고래를 잡아오면 해체는 어떻게 했나요?

강 : 고래 해체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어. 작업자의 체온에도 고래 살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자루가 긴 칼로 빠르게 해체했지. 고래 해체 작업을 하면 신선한 육회를 먹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소금 한 줌, 소주 한 병 가져와서는 고래 바로 옆에서 먹었어. 그때는 비교적 저렴하게 고래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어. 고래 고기는 열두 가지 맛이 난다지. 젖먹이 동물이라 그런지 몇 해를 냉동공장에 보관해도 표면만 걷어내면 뒤탈이 없었어.

배 : 주로 포획된 고래 종류는 뭔가요?

강 : 밍크고래가 주로 잡혔고, 몸집이 큰 나가수(참고래)도 더러 잡혔어. 맛 차이는 크게 없었고. 대형 고래는 기름을 얻기 위해 필요했어. 표피층이 두꺼워서 기름이 많이 나왔지. 겨울에 잡힌 고래는 지방층이 두꺼워 기름이 더 많았어. 고래기름은 드럼통에 담아 팔았지. 정제해서 화장품 원료로 쓴다더군.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영업 중인 고래식당 사장은 칠십 대인데도 피부가 고와.

배 : 당시 포경업자들은 큰돈을 벌었겠군요?

강 : 밍크고래 몸통이 어른 앉은키 정도 되었지. 당시 밍크고래 한 마리가 30만~50만 원 정도였어. 날씨가 안 좋으면 한 달에 한 마리도 못 잡았지만 운이 좋으면 하루에 두 마리도 잡았어.

강신규

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