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
이영걸 안동한지 대표

이영걸 안동한지 대표
이영걸 안동한지 대표

대구 2·28 민주운동 당시 보도사진을 포함한 4·19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우리나라가 기록물이 18건이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기록의 나라’가 된 데에는 종이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종이는 기록물에서부터 문살을 바르는 창호지나 방바닥을 덮는 장판지로 건축용, 산업용에까지 그 용도를 넓혀가면서 문명과 문화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종이는 인내심이 강하고 그래서 수명이 길다.

그 종이에 한평생을 바친 이영걸 안동한지 대표는 지난날의 영광이나 현재의 어려움보다 문화유산으로서의 계승 발전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고향 안동서 다시 시작한 한지 공장, 품질개선 통해 고급 화선지·서예지 각광 받아

한지는 용도 따라 전문성·실용성·예술성 구분… 문화재 보수 쓰이고 의류 만들기도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방문 때 세계에 소개, G20정상회의 실내장식으로도 주목

최근 수요 부족으로 위기 닥쳐… 각계각층 보전에 힘 모아 세계유산 등재 이뤘으면

-안동한지 전시관을 찾는 관광객이나 체험객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면서 일부 체험객들이 다시 찾고 있지만 아직 코로나 이전 수준을 회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넓은 주차장에 대형버스가 가득 찼는데 지금은 한가하지 않나. 전시관이 한가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지와 우리 전통에 대한 관심이 옅어지는 것같아 안타깝다.

-한지가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지의 특성과 자랑을 해 달라.

△한지는 부드러우면서도 가볍고 그러면서도 질기다. 보존성이 좋아 수명이 길다. 공기를 잘 통해주고 습기를 빨아들이고 내뿜는 통기성과 방음 보온효과도 뛰어나다. 이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2015년 전통한지 재현 사업 경연대회에서 안동한지가 선정됐고 현재는 정부 훈포장지로 한지가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우리의 기록문화 유산이나 목판이나 금속활자로 전해지고 있는 유산들을 비롯, 고문서들을 복원하는데 한지가 동원되면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삼국유사 목판사업에서 한지가 이용되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이니 조선왕조의궤용으로, 또 국립문화재보존센터의 문화재복원용으로 한지가 동원되고 있다.

-언제부터 한지와 인연을 맺게 됐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대구공고)를 중도에 포기하고 친척의 권유로 안동신시장 옷가게에서 일했다. 그러나 가게가 파산하면서 고교 복학의 꿈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때 충북 제천에서 철도국에 근무하는 조카사위로부터 한지공장이 많은 제천으로 와보라는 권유를 받고 한지와 인연을 맺게 됐다.

그때 나는 이미 30살로 세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주위의 권유에 용기를 내서 고향을 떠나 제천에서 새 인생을 시작한 셈이다.

-한지공장 직공으로 출발했다. 창업은 순조로웠나.

△3년 동안 한지공장을 내 집 드나들 듯 열심히 공정을 익혔다. 그러자 내 공장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제천시 영천동에 ‘영천한지’ 공장을 설립했다. 처음 10여 명의 종업원을 채용한 한지공장은 조그마한 가내공업 수준이었지만 오늘날 안동한지의 모태가 됐다. 공장이 궤도에 오르니 일감도 늘어나고 종업원들 월급도 올라가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변에 한지공장들이 새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우리 공장은 신기술 도입이 늦어지면서 판로가 막히고 회사 경영에도 어려움이 닥쳐왔다. 드디어는 종업원 월급을 체불할 지경에 이르렀다. 멋모르고 시작한 한지공장은 대량생산으로 이윤만 추구하다가 신기술 도입과 품질향상에 소홀히 한 탓이었다.

-회사는 도산했지만 좋은 경험이 됐을 것 같다.

△제천 공장을 팔아 직원 월급과 부채를 해결하고 15년만에 고향 안동 안막동으로 돌아왔다. 늙으신 부모님이 우리 5남매를 키우시던 논밭에 부모님을 설득해서 한지공장을 지었다. 제천에서 일하던 일당백의 직원 5명이 함께 했다. 안동을 비롯, 청송 영양 등지에서부터 멀리 원주까지 가서 닥나무를 수집해서 삶아 피닥을 전국의 한지 공장에 공급해주는 창고형 공장이었다.

공장을 설립하고 1년동안 꽤 많은 돈을 모았다. 그런데 연료로 폐타이어를 썼는데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고 마을을 덮치니 주민들의 민원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업은 호황이었지만 갈수록 높아지는 주민들의 민원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공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안동시가 제안한 지금의 풍산읍 소산동으로 이전하고 풍산한지로 재출발했다.

-풍산으로 옮겨와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안동한지는 고급화를 지향했다. 인사동에는 전주한지가 주름잡고 있었는데 안동한지를 고급화하자 화선지와 서예지로 각광받았다. 대량생산보다는 고품질 고급제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김휘동 당시 안동시장이 더 큰 시장을 내다보고 상호를 바꿀 것을 제안했다. 안동한지로 이름을 바꾸고 시설규모를 확장하면서 안동한지는 전국적인 한지 제조업으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지금 현재 직원들 중에서 제천시대부터 같이 일한 직원이 있다고 들었다.

△제천 한지공장 시절부터 오늘날 안동한지 공장으로 옮겨올 때 초지공 이창건 손춘모님과 건조공 김계회님이 같이 왔다. 30여 년 같이 일하다가 손춘모 초지공은 몇 년 전 작고했고 이창건 초지공은 고령으로 더 이상 한지를 뜰 수 없게 됐다. 김계회 건조공은 현재까지 40년 넘게 같이 일하고 있다.

-안동한지가 생산하는 한지의 종류는 어떤 것이 있나.

△한지는 용도에 따라 전문성, 실용성, 예술성으로 구분해서 생산한다. 전문성은 서예 족자용 족보 서적 전문화가용으로 쓰이고 실용성은 문종이 인테리어 장판 문화재 보수용으로 한지가 쓰인다. 예술성은 한지공예품이나 포장용으로 쓰이는 한지를 말한다.

종류로는 순지 창호지에서부터 외발지 화선지 배접지 색한지 대발지 천연염색지 실크지 요철지 등 70종이 넘는다. 특히 최근에는 국보나 보물급 지류 문화재의 보수 복원용으로 안동한지가 활용되고 있으며 2016년부터 정부의 훈포장지로도 한지가 사용되고 있다.

또 패션과 의류용 한지로 한복 속옷 양말에서부터 넥타이 손수건을, 공예용으로 핸드백 제기 닥종이 인형 찻상이나 쟁반 지승공예 등 80여 가지를 만들어 상설전시장에서 전시 판매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의 안동방문이 안동한지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하회로 가기 전 입구에 있는 안동한지를 방문하기로 계획했고 우리도 사전에 많은 준비를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공장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다리가 없었는데 방문 며칠 전 비가 많이 와서 개울이 넘쳐 여왕의 한지공장 방문이 불발됐다. 그러나 여왕의 안동 방문 전후로 주한영국대사와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안동한지를 방문했고 여왕의 안동 방문을 계기로 가장 한국적인 안동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안동한지도 붐을 탔고 그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회가 됐다.

-한지의 또 다른 세계적 히트 사례를 소개해 달라.

△서울 G20정상회의때 회의장 실내장식에 안동 한지가 사용되면서 한지의 우수성과 전통성을 세계에 과시하는 기회가 됐다. 2010년 11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정상회의 본회담장을 비롯한 15개 행사장 전체의 실내장식에 안동한지 2천500여 장이 사용됐다. G20정상회의에 참석한 세계 각국의 1만여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전통 한지와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할 수 있었다.

지금은 유럽 등 문화선진국에서도 문화재 복원용으로 일본의 화지 대신 우리 한지를 이용하고 있으며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한지 제조방식을 시연한 것은 우리 한지의 우수성을 인정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교황 요한23세의 애장품인 지구본을 우리 한지로 복원해 내기도 했다.

-그런 한지가 지금 위기라고 했다.

△한마디로 수요 부족이다. 소비가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주거환경이 한옥에서 아파트로 바뀌면서 한지 도배 장판지 수요가 많이 줄어들었고 실내장식도 유리가 한지를 대신하면서 소비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또 사회가 디지털화 될수록 한지 쓰임새도 적어지는 것 같다.

-안동으로 와서 기초의원으로 지역발전에 앞장섰던 시절도 있었다.

△제천에서 이사와 사업을 벌였을 때 안막동은 안동에서도 상대적으로 낙후지역이었는데 지역 발전을 위해 나서달라는 지역민들의 바람이 있었다. 또 당시 친구였던 김길홍 국회의원의 권유도 있어 출마하게 됐다. 안동시의원으로 당선된 뒤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안막동의 외곽도로를 개통하는 등 기대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닥종이 명인이기도 하다.

△전통한지는 전통기법을 활용한 제조와 신상품 개발을 위해 전통한지 제조기능 보유자 양성과 원료인 닥나무 재배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닥나무 명인에 신청해 2015년 종이문화재단으로부터 닥나무 명인으로 선정됐다.

종이문화재단은 안동 전주 원주 등 전통한지를 생산하고 있는 전국의 한지 품질을 조사한 결과 안동한지가 가장 우수하다며 명인으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지금 한지의 주 고객은 누구인가.

△지금은 한지공예를 비롯한 전통공예 예술가와 전통사찰, 문화재 관계자 등이 주 고객이다. 고문서나 고서화 같은 문화재를 복원 재현하는 박물관이나 동화사 해인사 통도사 불국사 등 사찰들이다. 또 민화 작가나 교육기관도 한지의 주요 고객이 되고 있다. 특히 민화의 전통 안료와 색감이 잘 드러나고 보존성도 좋은 것이 안동한지이다. 민화 그리기에 사용되는 한지는 값이 비싸기는 하지만 그만한 값을 하기 때문에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표구에 쓰이는 배접지로도 한지가 쓰이는데 고품질 고품격의 작품을 담을 그릇으로 한지가 제격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지의 홍보와 보급을 위해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안동에서 한지 축제를 열고 있다. 2009년 시작해서 해마다 안동에서 한지 축제를 벌이는데 올가을에도 10월 한지축제를 계획하고 있다. 한류문화의 세계화 추진 전략으로 시작됐으며 한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한지 산업의 지역 특화 및 다양화를 모색하는 행사로 한지 관련 업체 및 공예인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또 안동 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 한지 패션쇼를 벌이기도 했고 서울 운현궁에서 한지 패션쇼를 벌이기도 했다. 또 대한민국 공예문화박람회와 한국 스타일박람회 등에도 참여해 한지의 우수성을 적극 홍보했다.

-안동한지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는 문제는 어떻게 추진되고 있나.

△안동한지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은 안동한지의 우수성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것과 함께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보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등재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3월 우동기 국가균형발전위원장과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 김형동 국회의원, 이재갑 안동시의원과 김은경 안동시 문화관광국장, 그리고 7개 대학총장 등이 안동한지를 찾아 안동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지혜를 모았다.

이 자리에서 이남식 인천재능대 총장은 일본 화지는 연간 1조원 가량 유통되는데 비해 우리 한지는 1천억원대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한지 소비량을 늘이기 위해 건설업체와 협약을 맺어 신규 아파트나 주택을 건설할 때 방 한 칸을 한지로 도배해서 입주자의 건강도 위하고 한지 소비도 늘리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안동한지의 기술과 전통의 전승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나.

△세대를 이어 한지를 만드는 것이다. 세상이 AI시대, 빅데이터의 시대로 발전할수록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는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대를 이어가며 전통문화로 한지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들(이병섭 사장)은 이미 현장에서 20년 넘게 일을 하면서 한지 문화를 계승하고 있고 손자도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치면 한지를 배우고 이어갈 것으로 준비하고 있다.

 

□ 이영걸(李永杰·83)

안동한지 대표. 닥종이 명인.

안동 출신. 경덕중 졸, 대구공고 중퇴, 대구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수료.

제2대 안동시의원.

제천 영천한지공장 설립(1970), 안동 안막한지공장 설립(1986), 안동한지 설립(1988).

화엄사 고려대장경연구소에 화엄석경탁본용 한지 납품(2001).

서울국립중앙도서관에 고문서 복원용 한지 납품(2004).

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 한지패션쇼(2006), 서울 운현궁에서 한지패션쇼(2008).

자랑스러운 안동시민상 수상(2010).

삼국유사 목판사업 인출 제책용 한지 납품(국학진흥원, 2015).

정부포상 증서의 전통한지 재현 및 행자부 납품 시작(2016)

자랑스러운 경북도민상 특별상(2017).

영가문화상 수상(2020).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할 것을 생활신조로 삼고 자식들에게는 착하게 잘 살 것을 강조한다.

/이경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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