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과 베트남 리 왕조의 연결고리를 찾아서 (4)

‘리 왕조’ 건국 기념축제에 참여한 봉화군 관계자들과 베트남 사람들.

“현재 경북 봉화군은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그곳 봉성면 창평리엔 당신들의 조상인 ‘리 왕조’ 후손 이장발의 애국심을 기려 세운 충효당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일대에 역사와 문화, 휴양을 동시에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베트남역사관, 공연장, 연수·숙박 시설, 잘 꾸며진 정원까지 들어설 예정이다.”

기자의 말을 들은 주한 베트남관광청 리 쓰엉 깐(65) 대사는 “그 소식은 들어서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미 천 년 전부터 활발하게 교류했던 두 나라의 관계가 재정립되고, 지금 진행되는 한국과 베트남의 협력이 보다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기에 의미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36년, 베트남에서 29년을 살았다. 두 나라는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는 점과 충효를 중시하는 정서 등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

리 쓰엉 깐 대사는 13세기 초반 베트남에서 고려로 ‘정치적 망명’을 감행한 ‘리 왕조’의 왕자 이용상의 후손이다. 1994년 베트남으로 귀화하기 전엔 이창근이란 이름의 한국인으로 생활했다. 그러니, 누구보다 양국의 국민성과 지향점을 잘 알고 있을 터.

비단 이창근 대사만이 아니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과 베트남 모두가 과거 식민지였던 경험을 가지고 있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글 싣는 순서

1. 한국과 베트남 교류 역사의 시작
2. 동반 성장의 파트너가 된 베트남
3. 봉화군이 조성할 베트남마을
4. 베트남인들이 생각하는 한국과 봉화군
5. 봉화군과 베트남이 함께 꿈꾸는 내일

 

1천여년 전부터 호의적인 관계 지속… 경제·문화·관광 등 활발한 교류활동 확대

한국 유관순·윤봉길, 베트남 보티사우·이장발 등 나라 위해 희생한 독립투사들

부모 섬김·자녀 교육 등 중요시 여기는 양국, 우호교류 지속적 발전은 ‘명약관화’

조상의 위패에 예를 올리는 화산 이씨 종친회 이훈 회장(오른쪽)과 이부영 부회장(가운데).
조상의 위패에 예를 올리는 화산 이씨 종친회 이훈 회장(오른쪽)과 이부영 부회장(가운데).

◆식민지 경험과 뜨거웠던 독립 의지라는 공통점

한국은 20세기 초반 팽창하던 제국주의 국가 일본에게 국토와 국권을 빼앗긴다.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자신의 땅에서 생산된 각종 재화를 일본에게 수탈당했다. 국민의 거의 전부가 일본의 종살이를 한 형국이었다.

베트남은 이보다 먼저 19세기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제국주의의 착취 양상은 유사하다. 프랑스도 베트남 노동자들을 강제 징발했고, ‘아편의 원료를 재배하라’는 부도덕한 명령까지 내리는 등 베트남 국민의 일상을 파괴했다.

억압이 심해질수록 한국과 베트남의 독립의지는 뜨겁게 불붙었다. 이민족으로부터 나라를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독립투사들’이 생겨난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유관순은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옥사(獄死)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그녀의 나이 겨우 열여덟이었다. 윤봉길은 자신의 나라를 탄압하던 일본의 고위관료와 장성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품고 중국 상해로 떠난다. 당시 그의 나이도 겨우 스물넷.

한국에 유관순과 윤봉길이 있다면, 베트남엔 ‘보 티 사우’가 있다. 150㎝ 남짓의 조그만 소녀는 자신의 민족을 배반하고 프랑스의 주구(走狗)로 살던 베트남 관료를 폭사시킨다. 보 티 사우가 던진 폭탄에 프랑스 군인 20명도 부상당한다.

식민지 베트남에서 열린 프랑스의 법정. 법관은 그 조그만 소녀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총살이 집행되던 날. “내 나라의 강과 산을 보며 죽겠으니 눈가리개를 풀어라”고 당당하게 일갈하며 순국한 보 티 사우는 유관순보다 한 살 어린 열일곱이었다.

 

‘리 왕조’ 왕들을 모신 사당. ‘이조창업’이란 한자가 선명하다.
‘리 왕조’ 왕들을 모신 사당. ‘이조창업’이란 한자가 선명하다.

◆나라 위해 기꺼이 생명 버린 베트남계 조선인 이장발

한국과 베트남 청년들의 순정한 애국심은 비단 20세기 전후에만 발휘된 게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도 봉화 출신의 열여덟 살 청년 하나가 문경새재에서 일본군과의 교전 중 사망한다. 이장발(1574~1592)이다.

홀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던 그는 ‘더 큰 어머니’인 조국을 위해 주저함 없이 생명을 바친다. 그는 ‘리 왕조’의 혈통인 화산 이씨. 그러니, 말하자면 베트남계 조선인이다.

1750년 조선 유림들은 이 어린 청년의 기개와 용기를 높이 평가해 ‘충효당 화산 이공 유허비’를 세우고, 충효각을 지어 그의 정신을 기렸다. 이장발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남겼다는 시는 이런 내용이다. ‘두산백과’를 인용한다.

百年存社稷·백년사직을 구할 계획을 가지고

六月着戎衣·유월에 갑옷을 입었다

憂國身空死·나라를 위해 몸은 죽지만

思親魂獨歸·어머니 못잊은 혼백은 돌아가네

이장발은 1226년 베트남에서 고려로 이주한 이용상의 후손이다. 이용상 역시 몰락한 외국의 망명객을 따스하게 맞아주며 ‘화산 이씨’라는 성(姓)까지 선물한 고려를 위해 몽골군과의 전투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이창근 대사와 ‘리 왕조’ 건국 기념행사 덴도 축제가 열린 박린성 뜨선시에 동행한 화산 이씨 종친회 이부영 부회장은 입을 모아 말했다.

“아무리 강한 외세일지라도 굴복하지 않고, 부모를 섬기는 걸 높은 가치로 평가하며, 무엇보다 자녀들의 교육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한국과 베트남은 닮았다”고. 여기에 이런 말도 덧붙였다.

“한국은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반면, 베트남은 그렇지 않다. 인구의 대다수가 30대 이하인 젊은 국가다. 한국의 경제개발 노하우와 베트남 젊은이들의 열정이 효과적으로 결합된다면 두 나라는 더불어 커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실 1960~1970년대에 걸쳐 벌어진 베트남-미국간 전쟁에 한국이 참전한 시기를 제외하면 양국의 우애는 나빴던 때가 거의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베트남 뜨선시에서 펼쳐진 ‘리 왕조’ 건국 기념축제 현장.
베트남 뜨선시에서 펼쳐진 ‘리 왕조’ 건국 기념축제 현장.

◆한국-베트남간 우호적 교류 전통 이어갈 봉화 ‘베트남마을’

‘동북아문화연구 제26집’에 실린 강은해(계명대학 인문대)의 논문 ‘한국 귀화 베트남 왕자의 역사와 전설’의 서두는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는 일찍이 서로 동경하고 소통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중국이나 몽골, 일본 등 주변 국가와 달리 양국의 관계는 침략으로 얼룩지지 않았다…(중략) 우리나라 고려시대 황해도 옹진현에는 베트남 리 왕조의 왕자 이용상(李龍祥)이 망명해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과 문헌 사료가 전해오고 있다…(중략) 조선시대 1598년 정유왜란 때 진주에 살았던 선비 조완벽은 왜구에게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교토의 상인에게 팔려 문자를 안다는 이유로 상선을 타고 베트남을 세 차례나 오갔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에게 이수광의 시를 보여 주며 고아(高雅)한 시를 쓴 조선 선비에 대한 존경과 호의를 표시하기도 하였다…(하략).”

위의 논문을 통해 알 수 있듯 2023년 현재 한국과 베트남의 활발한 경제·문화 교류와 양국 사람들이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나, 관광을 하러 서로의 나라를 찾는 건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이미 수백 년 전, 아니 1천여 년 전부터 두 나라가 밀접하고 호의적인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왔다는 건 여러 고문헌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위에 언급한 논문엔 ‘망명객 이용상’이 정치적 박해 탓에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고향 땅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에 관한 구전도 인용된다. 이런 대목이다.

“高麗(고려) 때, 安南國(안남국·베트남)의 왕자 李龍祥(이용상)이라는 이가 우리나라에 망명을 해왔는데, 그는 고국 생각을 잊을 수 없어, 항상 이 바위 위에 올라서서 고국이 있는 남쪽 하늘 끝을 바라보고는 방성통곡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로 인하여 뒷날 이 바위를 越聲岩(월성암)이라 불러온다는 것이다.”

고려와 대한민국, 13세기와 21세기가 무엇이 다를까? 고향을 그리워하는 건 인간 보편의 감정이다. 오죽하면 미물인 여우조차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했을까.

봉화군이 추진 중인 ‘베트남마을 조성 프로젝트’는 한국인에겐 오랜 친구인 베트남과의 교류 역사를 떠올리게 하고, 한국으로 이주한 베트남인들에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줄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