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식 ⑤
포항 생활과 전쟁의 교훈

이봉식 /김훈 사진작가 제공

20대, 30대를 전장과 해병 훈련소에서 청춘의 뜨거운 시절을 모두 보낸 사람. 서른이 넘어서는 ‘해병대의 도시’ 포항에 정착해 후배들에게 해병 정신을 북돋으며, 전우회 활동을 통해 또 다른 사회적 봉사를 하고 있는 이봉식 선생. 그는 아흔둘이라는 나이에도 여전히 스무 살 청년처럼 보인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그는 어떤 당부를 하고 싶을까?

 

이제 포항이 제2의 고향이 되었어. 이웃이 다 친척 같고 그래. 내가 나이는 많지만 아직도 해병대 1기 자격으로 해병부대에 가서 부대원들에게 강연을 하곤 해.

강당에 1천여 명을 모아놓고 해병대 1기는 어떻게 훈련하고, 어떤 각오로 전투에 임했는지를 들려주곤 했지.

해병대를 포함해 전역한 군인들은 사회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지. 포항이 수해를 입었을 땐 빠른 복구가 필요해. 그럼 누가 나서겠어? 총을 들고 싸울 때는 용감하게, 대민지원을 할 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게 해병대지.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았으면 해. 6·25전쟁 때 참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어. 해병대원을 포함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세상을 떠난 군인들의 희생을 기억해주면 좋겠어.

홍 : 포항으로 이주할 때는 아직 창창한 시절이었겠습니다.

이 : 내가 서른한 살 때인데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어. 막내는 포항에서 낳았지. 아내도 교사를 그만둔 때라 생활이 어려웠어. 포항으로 오기 전엔 해병 훈련소가 있는 진해에서 살았고, 아이들도 거기서 학교를 다녔지. 그런데 갑작스럽게 포항으로 왔어. 지금 돌아보면 포항과 나 사이에 특별한 인연의 끈이 있었던 모양이야. 제대 후 선배들이 “전매청 과장 자리를 줄 테니 서울로 오라”고 했는데도 안 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야.

홍 : 포항과의 60년 넘는 인연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군요.

이 : 젊었을 땐 술을 좋아했고 친구들도 좋아했지. 성품이 그러니 술 한잔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많은 이곳이 좋았어. 그래서 해병대 전우들을 떠나지 못하고 포항에서 이렇게 살고 있군. 포항에 정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 여기 와서 삶의 이런저런 보람과 즐거움을 많이 느끼며 살았으니까.

홍 : 훈련소 시절에 해병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건 무엇인가요?

이 : 해병대에는 전통이 있어. 그게 해병대 정신이기도 해.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이걸 강조했어. 강인한 체력과 정신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었지. 해병대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 내 임무였어. 그래서 교육을 혹독하게 했어. ‘이걸 감당하지 못하면 해병 전통을 이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어. 해병대 1기는 하루에 한 끼를 먹고도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았어. 싸우면 이긴다는 게 해병의 긍지야. 그걸 훈련병들에게 인식시키는 게 훈련소 교관이던 내 임무였어. 아직도 젊은 시절과 마찬가지로 해병대에 대한 애정은 물론이고, 함께 싸우고 고생한 전우에 대한 사랑이 여전해. 그런 마음이 나를 포항으로 이끈 것이기도 하고.

홍 : 포항으로 오고 나서 1960~1970년대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요.

이 : 군대를 나와 고향으로 가느냐, 서울로 가느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포항으로 왔지. 그때까지 포항은 두 번 와본 게 전부였어. 20대 중반 때 부대 인수 작업을 하려고 왔더랬지. 당시엔 부대에 울타리도 없고, 미군들이 비행장을 꾸리고 있던 자리인데 그저 넓기만 했어. 그 인수 작업을 한다고 몇 달 동안 포항에 있었지. 포항에 오게 된 건 누구의 권유라기보다 스스로 해병대와의 인연을 끊지 못해서였어.

홍 : 어떤 인연인가요?

이 : 11년간 해병 생활을 하다 보니 해병대 사단이 있는 포항에 마음이 갔어. 당시엔 포항으로 해병부대가 속속 옮겨오던 때이기도 했고, 동기와 후배들이 많았지. 그들이 “함께 포항에서 지내자”는 얘기를 했었고, 마음이 움직였어. 해병대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거였지. 오천 인구가 3천 명 정도일 때 포항으로 왔어. 사격장 근처 마을에 방을 얻어 살림을 시작했어. 가진 것 없이 낯선 고장에서 생활을 이어갔지. 그때는 포항의 길 대부분이 비포장이었어. 먼지가 풀풀 날리던 과거 포항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 친구가 차린 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다른 일을 하기도 했어. 고생이 심했던 시절이야.

홍 : 포항에 정착한 이후의 기억을 들려주시죠.

이 : 오천에서 시내로 나오려면 지금 포스코가 있는 동촌을 지나야 했지. 온통 비포장길인데 걸어서도 나오고, 차를 얻어 타고도 나왔어. 차가 달리면 길 양쪽으로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지. 당시 건설업에 손을 댄 친구가 있어서 그 일을 돕기도 했어. 형산강을 건너는 다리도 나무로 만들어졌던 시절이지. 다리 옆을 보면 갈대밭이 우거져 있었어. 지금 고속터미널 자리와 오거리 앞이 전부 갈대밭이었지. 죽도시장에서 할머니들이 생선 몇 마리를 놓고 팔던 게 기억나는군.

홍 : 그 시절엔 다들 가난했지요.

이 : 경작할 논밭이 넓은 것도 아니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을 배를 가진 사람도 드물었어. 그러다 보니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사는 이들이 많았지. 그런 상황이었으니 한때는 ‘내가 포항에 괜히 온 게 아닌가’ 하는 후회도 했어. 하지만 젊을 때였고 일단 결심하고 왔으니 잘살아보려고 노력했지. 아내도 오천에 작은 가게를 열어 시내에서 물건을 떼와 팔았어. 하지만 자존심을 버리지는 않았지. 목숨을 건 전투에서 살아남은 해병대 1기로서 당당하게 살고자 했어. 면장, 지서장, 우체국장 등도 좋은 자리가 생기면 나를 부르곤 했지.

 

상륙 돌격하는 해병대. /출처: 해병대사령부‘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1949∼1999)’
상륙 돌격하는 해병대. /출처: 해병대사령부‘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1949∼1999)’

홍 : 포스코가 건립되는 과정도 봤겠습니다.

이 : 1960년대 중반에 대규모 월남 파병이 있었고, 그 무렵 포스코가 포항에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공장 건설을 위해 기술자들이 측량하고 그러니까 포항 사람들도 마음이 들떴고, 전국에서 건설업자들이 몰려들고 그랬지. 그러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났어.

홍 : 어떤 일을 하며 포항에서의 청장년 시절을 보냈나요?

이 : 작은 금융회사를 차려 직원 두세 명을 두고 일했어. 그때는 신고만 하면 그런 업종을 허가해줬지. 그런데 돈을 빌려주고 받는 일이 내 성격에 맞지 않았어. 게다가 같은 업종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기도 했고. 중도에 손해를 보고 접었어. 포스코가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하청업체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는데, 내가 무슨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군대밖에 모르던 사람이니 쉽지 않았지.

홍 : 죽도시장에서 점포도 운영했다면서요.

이 : 지금은 현대화된 모습이지만, 내가 젊은 시절의 죽도시장은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도 발이 빠질 정도였어. 상인들은 고래고기와 생선 등을 노점에서 팔았지. 말 그대로 서민들의 애환이 가득한 곳이었어. 거기서 육계 사업을 했어. 닭을 사와서 파는 일이었지. 아이들 교육하고, 밥 굶지 않을 정도로 살았어. 나만 아니라 대부분의 포항 사람이 그랬지.

홍 : 다른 일은 하지 않았나요?

이 : 포항에서 만난 친구가 보경사 미술관 운영을 맡아달라고 해서 그걸 했어. 22년 전이었으니까 일흔을 앞두고 있을 때지.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일했어. 종무소 옆 사무실에 불교 관련 미술품이 많았는데 그걸 관리하고 판매하는 일이었지. 10여 년쯤 했어.

홍 : 61년을 살았으니 이제 포항이 고향 같겠습니다.

이 : 그렇지. 지내오면서 적지 않은 해병대 전우들, 기자들, 기관장들과 친분이 쌓였어.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는데, 그런 걸 오랜 세월 겪으면서 이제 포항이 제2의 고향이 되었어. 이웃이 다 친척 같고 그래. 내가 나이는 많지만 아직도 해병대 1기 자격으로 해병부대에 가서 부대원들에게 강연을 하곤 해. 잊지 않고 초청해서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해병대가 고맙지.

홍 : 해병 후배들을 위한 강연은 언제부터 한 건가요?

이 : 40대부터 시작해 2년 전까지 했어. 반세기 동안 한 거지. 나는 해병대와의 인연을 간직하고 평생 살았어. 포항의 해병부대에서는 신병들만이 아니라 사단 전체 모임을 열어 강연을 부탁하기도 했어. 강당에 1천여 명을 모아놓고 해병대 1기는 어떻게 훈련하고, 어떤 각오로 전투에 임했는지를 들려주곤 했지. 지금 해병대에 오는 젊은이들은 아주 명석해. 그런 후배들 눈빛을 보면서 내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지.

홍 : 포항 6·25회 회장이시지요?.

이 : 15년 전에 맡았어. 지금은 고문이야. 해병대를 포함해 전역한 군인들은 사회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지. 포항이 수해를 입었을 땐 빠른 복구가 필요해. 그럼 누가 나서겠어? 토사에 밀려 쓰러진 벼를 세우는 이들이 바로 해병대야. 해병대 사단 차원에서 민간을 지원하는 것이지. 그런 일이 있을 땐 사단장에게 전화해 “참 보기가 좋습니다”라고 얘기해. 총을 들고 싸울 때는 용감하게, 대민지원을 할 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게 해병대지.

홍 : 해병대는 대민봉사에도 열심이지요.

이 : 해병전우회는 일사불란하게 연락해서 포항에서 큰 행사가 열릴 때는 교통정리도 하지.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내가 해병대 출신인 것이 자랑스러워. 요즘도 포항시에서 전승행사, 문화행사 등이 개최되면 해병전우회가 행사를 돕기도 해. 그런 것이 해병대를 홍보하는 효과도 있겠지.

홍 :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이 :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았으면 해. 6·25전쟁 때 참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어. 해병대원을 포함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세상을 떠난 군인들의 희생을 기억해주면 좋겠어. <끝>

/대담·정리 : 홍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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