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작가가 만난 ‘이 한 사람’
세계 최고의 고분자 전해질 연구자 박문정 포스텍 화학과 교수

박문정 포스텍 교수

과학기술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분야로 알려져 있지만 오랫동안 성별 편향성을 드러냈다. 신약 연구에서 수컷 개체만을 사용한 결과 여성은 더 많은 의약품 부작용을 겪는다는 FDA 조사결과도 있었다. 노벨과학상에서 여성 비율은 4%에 불과하며, 뛰어난 여성 과학자들은 당대의 편견과 맞서야했다. 우리 사회 또한 과학기술 분야의 유리천장은 견고하다. 과학기술 연구개발(R&D)을 담당하는 관리직 가운데 여성 비율이 10%에 불과하다. 주변에서 여성 과학자를 만날 기회는 드물다.

고분자 화학 분야의 세계적인 연구자인 박문정 교수와 약속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미국 출장과 국내 여러 학회 일정 사이에 찾아간 연구실은 여성 과학자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교수님들은 방학에 주로 뭘 하며 보내나.

△포스텍은 연구중심대학이라 강의 시수가 적다. 한 학기에 보통 한 과목 반을 가르친다. 한 과목이라 하면, 한 시간 반 수업을 주 3회 한다. 강의만 빠진 거지, 학기와 다른 것이 없다. 오히려 각종 학회 일정이 몰려 더 바쁘다.

-연구실 한 벽을 가득채운 아이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

△오전 8시에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을 등교시키고 바로 출근한다. 중간에 학원을 태워주고 연구실에 데려와 저녁도 먹인다. 밤 10시까지 같이 있다가 퇴근한다. 코로나 이후 수업이나 회의가 화상으로 대체되면서 아이를 돌봐주시던 부모님이 본가로 가셨다. 처음에는 화상회의만 하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애를 먹었지만 지금은 혼자 만화책을 읽는다. 주말부부라 평일 육아는 내가 전담한다.

 

화학 여러 분야 중 고분자 화학 연구

한국인 최초 미국물리학회 ‘딜런 메달’

세계 최초로 전해질 나노 구조체 생산

엄청난 노하우 필요 연구자 박 교수뿐

전력 없이 작동하는 인공근육 개발

현재 게임용 ‘햅틱 글러브’ 개발 중

포스텍은 연구시설 잘 갖춰져 있어

질 높은 연구 성과와 밀접한 연관

-여성과학자의 현실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화학과 교수면서 미국물리학회의 ‘딜런 메달’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연구하는 분야가 정확히 무엇인가.

△화학과의 화학공학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화학은 물질의 구조와 변화를 다룬다면 화학공학은 제품개발까지 연결된다. 화공을 전공하고 화학과에 임용된 것은 운이 좋은 경우다. 나는 화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고분자화학을 연구한다. 물질의 특수한 성질을 결정짓는 가장 작은 단위가 분자이다. 고분자(高分子, high polymer)는 분자량이 크다는 의미다. 분자 하나는 쉽게 휘발되지만 고분자는 그렇지 않아 다양하게 사용된다. 플라스틱을 비롯해 생활용품 대부분이다. 쓰임새에 따라 고분자를 합성하는 연구가 고분자 화학이다. 화학 가운데서도 물리학에 가까운 물리화학을 한다. 딜런 메달은 젊은 고분자 물리화학자에게 주는 상이다.

-대표적인 연구는 배터리와 인공근육으로 알려져 있다.

△내 연구의 핵심은 고분자 전해질이다. 고분자 전해질이란 유동성이 없는 고체인 고분자가 이온을 잘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물질이다. 연료전지에서는 수소이온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리튬전지에서는 온도 변화에도 리튬을 안정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인공근육에서는 미세한 동작을 잘 구현할 수 있게 고분자를 합성하는 연구를 한다.

-수소차 연료전지로 시작해 전기자동차의 리튬전지 연구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박사 후 과정을 할 때 수소연료전지 전해질을 연구했다. 국내 들어와 보니 수소연료전지로는 연구비를 받을 수 없었다. 국내 에너지정책은 정치성이 강한 탓이다. 당시 주목받던 리튬전지로 전환했고 지금까지 오게 됐다. 수소연료전지든 리튬전지든 이온이 흐르는 원리는 같다.

-리튬전지의 어떤 부분을 연구하나.

△전기 자동차와 스마트폰의 핵심 부품인 리튬전지는 폭발의 위험성이 있다. 리튬전지의 액체 전해질 대신 고분자 전해질을 사용하면 폭발 위험을 낮추지만 충전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문제다. 나는 이런 현상을 나노 구조체 합성을 통해 해결했다. 이온이 지나가는 통로의 폭을 좁혀 이온이 흩어지지 않도록 효율을 높인 것이다. 샤워 헤드의 물줄기를 세게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세계 최초로 전해질 나노 구조체를 생산했고, 현재까지 이 일을 하는 연구자는 나밖에 없다. 엄청난 노하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일반에는 인공근육 연구자로 더 알려져 있다. 이전 인공근육 연구와 어떤 차이가 있나.

△하버드대에서 뇌졸중 환자의 보행을 돕는 ‘엑소슈트(Exosuits)’를 개발해 주목받은 적이 있다. 운동능력의 3,40%을 향상시켜주는 일종의 입는 로봇으로, 아이언맨 슈트가 스파이더맨 슈트로 진화한 것이다. 우리 연구와 하버드의 가장 큰 차이는 전력이다. 하버드에서 만든 슈트는 가정용 전압 200볼트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야한다. 우리는 1.5볼트 전지 하나면 되도록 했다. 스스로 움직이는 식충식물인 파리지옥처럼 전력이 없어도 작동하는 인공근육도 개발했다.

 

미국 물리학회에서 딜런메달 수상 후 수상강연하는 박문정 포스텍 교수.
미국 물리학회에서 딜런메달 수상 후 수상강연하는 박문정 포스텍 교수.

-제품으로 나와 있나.

△인공근육 기반의 의료용 기구가 나와 있지만 시장이 크지 않다. 현재는 게임용 ‘햅틱 글러브(Haptic Glove, 촉각 장갑)’를 개발 중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장갑을 끼고 게임을 하면 터치 유무만 인식되지만,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 게임이 실감나려면 속도와 세기까지 더 세밀해야한다. 라텍스 장갑처럼 얇고 가벼운 장치에 인공근육을 연결해 세밀한 조작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인공근육 아이디어는 파리지옥에서 얻었고, 얼음이나 커피나무를 이용한 연구도 주목받았다. 아이디어는 어디서 가져오나.

△다른 분야 세미나를 굉장히 열심히 듣는다. 타 분야 연구를 듣다보면 내 분야와 접점이 보인다. 고분자의 합성에 얼음을 활용한 아이디어는 환경공학자의 논문 발표회장에서 나왔다.

-되겠다 싶어 시도했는데 실패한 경우도 있나.

△커피나무에 있는 카페인산을 이용해 고속 충전되는 리튬 전지를 개발했다. 수없이 많은 분자들을 들여다본 결과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백만의 천연 화합물 가운데 원하는 분자구조를 찾는 일은 결국 시간 싸움이다. 시도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전혀 전지 성능이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 실패가 비일비재하다. 결국 해봐야 안다. 우리가 하는 실험 대부분이 후보군을 찾아 테스트를 하는 것이다. 후보군을 좁혀가며 심도 깊게 테스트를 반복해서 단 하나를 얻는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어느 분야까지 관심을 가져봤는지.

△인공근육 연구를 하면서 환자들의 심리를 공부했다. 인공근육이 드러날 때와 감춰질 때 환자의 심리 상태에 차이가 있다. 몸이 아프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쉬워, 치료과정의 세심한 배려들이 회복속도와 연관된다. 내가 하는 연구와 관련 있는 강연은 열심히 찾아듣는다.

예술가가 영감을 받듯 주변에서 연구 아이디어를 얻고 다른 분야를 경청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온 박문정 교수.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순정응용화학연합(IUPAC)의 ‘젊은 과학자상’을 수상했고, 미국물리학회의 ‘딜런 메달’을 수상한 최초의 한국인이며, 고분자 화학분야 국제저널 편집위원이 된 것도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다. 한 번 마음먹은 것은 포기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가는 확고함과 집념의 이 과학자는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또래들 중에 돌 사진이 없는 몇 안 되는 아이였다. 남아선호사상이 남아있던 때라 유치원도 오빠만 다녔는데 그렇게 부러웠다. 산수를 유난히 좋아했다. 네다섯 살 무렵, 옆집 살던 동갑내기와 대결을 하면서 세 자릿수 곱하기 두 자릿수를 익혔다. 친구에게 지고 밤새 울면서 연습했고 다음 날 결국 둘 다 백점을 맞았다. 초중학교에서는 반장을 도맡았는데 수학시험 0점을 맞은 친구를 집에 데리고 와서 가르쳤다. 중학생 때는 유기정학 당한 친구의 공부를 도와 성적을 엄청 올리기도 했다.

-방황했던 기억은 없나.

△늘 1등만 하다 경기과학고에 가니 성적은 실망스러웠고 기숙사 생활은 적응이 안됐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팬이었는데 이들이 출연하는 방송을 보려고 학교 담을 자주 넘었다. 단골 치킨가게에서 감자튀김 하나 시켜놓고 텔레비전을 보고 PC통신 천리안에 글을 올렸다. 워낙 자주 가니 사장님도 그러려니 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기숙사 사감한테 한 번도 안 걸렸다.

-미국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치고 포항에서 자리 잡게 된 계기는.

△포스텍은 연구중심대학으로 연구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던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 가속기가 있었는데 거의 살다시피 했다. 가속기 때문에 포항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한국에는 없는 전자현미경 실험을 하러 미국까지 다녀오곤 했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구시설이 가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질 높은 연구 성과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고분자 화학 분야에선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이공계는 여성이 소수다보니 편견이 여전하다. 여자 교수는 육아하느라 연구에 집중하지 않고 승진을 다하면 느슨해진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편견은 깨질 수도 혹은 굳힐 수도 있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 분야에서 연구를 제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 하던 대로 하자. 그것이 나의 계획이다.

박문정 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받고 미국 로렌스버클리연구소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했다. 현재 포스텍 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생활용품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고분자를 배터리나 의료기기와 접목해 활용도를 높이는 연구를 한다. 여성과학기술자상(2015), 미래창조과학부가 수여하는 젊은 과학자상(2016), 국제순정응용화학연합(IUPAC)의 젊은 과학자상(2016) 수상에 이어 한국인 최초로 ‘딜런 메달(John H. Dillon Medal)’을 받았다. 미국 물리학회에서 박사학위 이후 12년 내의 젊은 과학자에게 수상하는 메달이다. 현재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화학회지 ‘매크로몰리큘러스(Macromolecules)’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

/배은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