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④
여성단체협의회 결성과 포항시 여성상 제정

제76회 전국체전에서 음료 봉사를 하고 있는 여성자원봉사자(1995년). /포항여성사

세상에 첫길을 내려면 여러 사람이 함께 걸어야 한다. 혼자 걸어서는 첫길을 낼 수 없다. 포항 여성사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의 지혜와 힘이 모여 포항 여성의 역사가 서서히 만들어졌다. 물론 일이 이뤄지는 과정에는 누구보다 먼저 고민하고 앞장선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포항 여성들은 언제 어떻게 한마음이 되어 모였으며, 어떤 일을 했을까.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한부인회·적십자 봉사대·걸스카우트 포항지부·포항YWCA·포항차인회 등 여성단체들이 협력하고 힘을 모으기위한 ‘포항시 여성단체협의회’가 발족했지”

1970년대에는 친목단체가 대부분… 여성이 주축이 돼 여성의 일을 추진할 단체가 필요했다.

“전국 최초로 기획된 여성문화제… 포항 여성들은 서예·바둑 등서 기량을 뽐냈다 정말 뿌듯한 것은 여성 권익 신장에 공헌한 여성을 시상는 ‘포항여성상’ 제정었지”

1997~2016년까지 이어진 포항여성상은 이후 여성 정책 패러다임 변화로 ‘양성평등상’이 됐다.

최 : 포항의 여러 여성단체 역사를 살펴보면 김경희란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

김 : 내 나이 아흔이 다 되어가는데 친목계까지 합하면 17개 단체에 나가고 있다. 새마을부녀회 활동이 출발이 됐고, 가장 오랜 기간 회장을 맡고 있는 단체는 불교여성회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회장을 하고 있으니 장기 집권이 아닌가 싶다. 절은 산 중에 있다. 젊어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아다닐 수 있지만 나이 들면 몸이 따라주지 못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쉽게 찾아가 수양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주변 사람들과 그런 취지에서 의논을 했다. 스스로 자유롭게 모여서 기도하는 단체를 만들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불교계의 YWCA 같은 불교여성회가 조직된 것이다. 조직이 구체화되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차원태 변호사 건물의 5층을 빌려서 했다. 그런데 인원이 40~50명 되니까 장소가 협소했다. 회관을 지을 생각도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산각 건물 2층을 빌려서 모이다가 부산각 지하가 넓어서 그쪽으로 옮겼다. 법회를 한 후 바로 식사를 하기에도 편리해서 지금까지 그곳에 터를 잡고 불교여성회 모임을 하고 있다.

한국여성불교연합회 포항불교여성회는 1984년 포항시민회관에서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이두 큰스님을 모시고 설법회를 열며 창립총회를 했다. 그 후 전국불교 연합회 포항불교여성회로 개칭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의 평화를 이룩하여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최 : 불교여성회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요?

김 : 매년 어린이 심장이식기금을 전달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봉사도 함께 해왔다. 봄가을에는 성지순례도 하는데 이름 있는 절이란 절은 다 다녔다. 회원들은 내가 나눠준 좋은 글을 참 좋아한다. 혼자만 알고 느끼면 뭐가 좋은가. 나는 좋은 것은 모두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깨우침이 가득한 스님들의 좋은 말씀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스님들의 좋은 말씀을 복사해두었다가 매달 모임 때 회원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일도 20년 넘게 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모임이 끊어졌지만 그 일이 내 평생의 일임을 알기에 불교여성회는 내가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이어갈 것이다.

최 : 1980년대 포항에는 어떤 여성단체가 있었는지요?

김 : 봉사 단체가 많았다. 변석화가 초대 회장이었던 대한부인회, 안인화가 초대 회장이었던 포항적십자 봉사대, 박경애가 초대 회장이었던 걸스카우트 포항지부, 홍윤옥 회장이 맡았던 포항YWCA, 그리고 포항차인회 등의 단체가 있었다.

최 : 그 많은 단체를 하나로 묶은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맡았더군요.

김 : 김보미 포항시 과장이 나를 불러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여성단체를 하나로 묶는 총괄 단체가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했다. 지역의 여성단체들이 서로 협력하고 힘을 모은다는 점에서 아주 긍정적인 제안이었다. 그렇게 포항시 여성단체협의회가 발족되었고, 새마을부녀회장이었던 내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처음에는 사무실도 예산도 없었다. 김보미 과장이 예산을 만드느라 고생이 많았다.

1970년대에도 크고 작은 여성단체가 있었지만 친목을 위한 단체가 대부분이었다. 여성이 주축이 되어 여성의 일을 추진할 수 있는 단체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여성단체를 통해서 여성들의 활동 영역이 넓혀지기를 김경희는 원했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최 : 여러 단체를 하나로 결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김 : 여러 사람, 여러 단체를 상대하다 보면 내 생각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끼게 된다. 아무리 좋은 의견도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심은 통한다는 믿음을 품고 여성단체 관계자들을 만나 협의회 결성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렇게 활동한 결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단체 대부분이 협의회에 가입했다. 회원 수가 무려 2만 6천여 명에 달하는 명실공히 포항을 대표하는 여성단체협의체가 결성된 것이다. 이 협의체를 통해 여성의 능력 개발, 사회참여 확대, 성차별 해소, 여성 지위 향상 같은 여성 사업에 한결 더 힘이 실리게 되었다.

포항시 여성단체협의회는 보건복지부의 여성단체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추진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 방안도 결국은 여성이 주축이 돼 일궈낸 일이다. 출범의 계기가 어떠하든 여성단체협의회는 많은 일을 해냈다.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를 위해 여성 지도자 양성 과정을 만들었고 여성단체 활동 평가회 등을 개최했다. 회원 단체 간의 정보 교환과 공동 관심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여성의 시정 참여 확대를 위해 포항시의 각종 위원회에 여러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최 :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업이 있는지요?

김 :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지 의논한 끝에 여성문화축제를 해보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전국 최초로 여성문화제가 기획되었다. 포항여성문화제에서는 여성백일장, 서예대회, 바둑대회 등 포항 여성들의 기량을 뽐내는 대회를 열었다. 특히 서예대회는 백일장처럼 시간제한을 두고 여성들의 서예 능력을 겨루었다. 행사 당일 문화예술회관 안팎에 화선지를 펼치고 붓을 들던 여성들의 모습이 장관을 이뤘다. 여성들만 참가하는 바둑대회, 패션쇼, 사진전 등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실 남자들 기죽이는 건 다 해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게 이런 것인가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정말 뿌듯한 것은 포항여성상을 제정한 것이다. 여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크게 공헌한 여성을 선정해 시상하자고 내가 제안했다. 그렇게 안이화, 손정식, 박경애, 홍윤옥, 김봉순이 제1회 포항여성상 수상자가 되었다.
 

포항에서 개최된 전문직여성클럽(B.P.W) 전국대회(1994년 6월).   /포항여성사
포항에서 개최된 전문직여성클럽(B.P.W) 전국대회(1994년 6월). /포항여성사

포항여성상은 포항시가 1997년부터 여성의 권익 증진과 봉사활동에 기여한 지역 여성을 선정해주는 상으로, 2016년 제19회까지 이어졌다. 2017년 이후 포항시는 실질적 양성평등 실현이라는 여성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로 조례를 개정하고 양성평등상을 시상하고 있다.

최 : 전문직여성클럽은 어떻게 결성되었는지요?

김 : 여성이 힘을 가지려면 공적 체제와 결합해야 한다. 그런 역할을 해줄 공무원이 필요했는데 김보미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그는 그것을 행정의 틀 안에서 소화해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나도 그도 서로의 전폭적인 지지자였다. 그를 만나 여러 가지 일을 해냈다. 전문직여성클럽(Business & Professional Women‘s clubs)도 그중 하나다. 전문직 여성을 모아보면 어떻겠느냐고 김보미가 제안했다. 지역에도 전문직 여성들이 꽤 있는데, 그들을 모아서 여성의 권익을 향상하는 데 힘을 보태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전문직 여성들을 만나 뜻을 전했고, 대구 클럽의 후원으로 1989년 포항클럽이 결성되었다.

전문직여성클럽(B.P.W) 포항클럽은 1989년 4월, 김경희 초대 회장을 중심으로 김춘희, 김보미, 김희숙, 박영희, 이순자, 이정주, 한정자가 모여 결성되었다. 초창기에는 친목 도모에 머물렀으나 1994년 포항에 전국대회를 유치하며 활기를 띠었다.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 지역 내 여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전문직 진로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최 : 그 밖에 주목할 만한 여성계의 활동이 있는지요?

김 : 여성 신년 교례회도 주목할 만하다. 새해에 여성들이 모여 한 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논의하는 자리다. 여성 정치인들과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모았다. 여성 언론인도 있고 시장 부인, 국회의원도 있다.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보태주니 힘이 났다.

 

김경희

포항에 산 지 올해로 여든여덟 해가 지났다. 그사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와 4·19가 있었지만 유년의 기억은 늘 가슴 뛰게 빛났다. 포항여중과 포항여고 재학 당시 합창부와 미술부를 병행할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였고, 미술부원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할 만큼 신뢰를 소중하게 여겼다. 모교인 포항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결혼 후 4녀를 둔 가운데 여성 권익과 여성 교육을 위해 쉼 없이 뛰었다. 1973년 포항새마을 부녀회장, 1977년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맡았고, 같은 해 죽도동 여성회관추진위원회에 총무로 있으며 여성회관이 건립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부터 죽도유아원과 새마을 협동유아원 원장으로 5년간 근무했고, 1984년 포항불교여성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37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다. 1987년에는 포항의 여성단체를 총괄하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1989년에는 전문직 여성클럽(BPW)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 포항여성회관 초대 관장(5급)으로 추대되었지만 봉사 정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1995년 통합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같은 해 경상북도 5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포항시 여성상을 수상했다. 1985년 대통령 훈장 근면장을 받았고, 2003년에 한국불교여성개발원이 선정한 108인에 추대되었으며, 2001년에는 포항시민상과 대통령 공로장을 받았다.

대담·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