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에서 봉준호의 ‘기생충’ 까지

2019년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기생충’의 포스터.

얼마 전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이제 거의 극장에서 내려가 상영하는 곳을 찾기 쉽지 않지만, 아직 사람들의 입에서는 내려가지 않고 있다. 단지 한국에서 처음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가 던지고 있는 사회적 이슈나, 그것을 다루고 있는 방식이 의미 있었던 것이리라.

이 영화에 대해서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던 관객에서부터 고개를 갸웃거렸거나 심지어 불편함을 느낀 관객까지 있었겠지만, 적어도 이 ‘기생충’은 한국 영화에서는 이제 몇몇 예술영화라는 장르 속에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 ‘상징’의 힘을 보여주었던 영화로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서사가 주는 불편함이란 단지 그것의 약점 내지는 결여만은 아닐 것이다. 그 불편함은 바로 우리가 매혹되어 온 상징의 실체를 직시하게 될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인정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 상태에서 비롯된다.

사실, ‘기생충’이 드러내고 있는 ‘상징’의 세계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폭로된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문화적 산물로서의 ‘상징’은 현대 사회가 적어도 백 년 이상 계속해서 유지해왔던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신념과 그것을 가능케 했던 계급적 취향의 문제, 그리고 그러한 취향에 기생하여 형체를 유지해왔던 지식과 문화 담론이 갖고 있는 실체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상징’은 소설이나 영화의 언어적 층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 저변에 널려 있는 상품의 표면과 그 배후로부터 도래하여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을 이끄는 힘을 갖는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본의 상징이 갖는 힘에 대해 얼마나 무기력한가. 저 반짝거리며 나의 눈길을 끄는 브랜드의 로고가 갖는 힘에,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외국어 단어 몇 자에, 너무나 확고해 보이는 취향이 갖는 힘에 마주하는 인간은 언제나 그것에 매혹될 수밖에 없다. 전혀 실체를 갖지 않는 예술이 차가운 자본의 사회에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사실은 삶에 있어서 어떠한 유용성을 갖지 않는 지식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매혹적인 까닭은 어쩌면 그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가난한 ‘기택’의 집은 아무런 실체를 갖지 않는 ‘상징’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인 경제 주체가 되지 못하는 ‘기택’이 가족들을 모아 놓고 전통을 내세우며, 가족의 가치를 말하는 대목이라든가, 수능에서 수도 없이 실패했던 아들 ‘기우’가 ‘교육’의 이상에 대해서 말하는 대목, 딸인 ‘기정’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해외 대학이나 미술가들의 이름은 모두 실체를 갖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힘을 갖는 상징이다. 허영과 기대감이 교차할 때, 실체 없는 상징은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반면, 스타트업이 성공하여 벼락부자가 된 ‘동익’과 ‘연교’의 집은 상징이 결여된 실체로 가득 차 있다. 유명 건축가가 지었다는 집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집의 예술적 가치가 아니라 자본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바로 ‘동익’과 ‘연교’가 매혹된 상징과 그 상징의 연쇄로서의 구성된 세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연교’는 자신과 오래 인연을 맺어왔다는 과외선생 ‘민혁’으로부터 ‘기우’를 소개받고, 소개라는 인간의 관계에 의한 보증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보증이나 신용 등은 ‘기우’ 등이 거창하게 늘어놓는 상징에는 무력하다. 하긴 누구라고 매혹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역사적으로 이야기해본다면, 자본의 힘을 가지고 귀족의 신분적 정통성을 누르고자 했던 부르주아 계급이 자기를 구별 짓기 위한 방편으로 구성한 계급적 취향이 바로 이러한 예술이나 지식의 상징에 대한 매혹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귀족 사회에도 이러한 취향은 없지 않았으되, 자본이라는 양적 기준이 신분이라는 질적 기준으로 옮겨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특수성이 바로 이처럼 상징에 취약한 문화적 경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에 놓여 있는 한국 사회에서 학벌이나 지식, 예술에 대한 태도 등은 여전히 과시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자기 취향을 보여주는 상징 형식에 무기력한 인간들을 만들어낸다. ‘동익’과 ‘연교’의 집은 바로 그러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자본주의의 문화적 상징을 읽어낼 수 있는 영화(물론 그 영화 자체도 하나의 상징이며, 그것을 읽어내는 것도 지식적 상징을 구축하는 행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작가는 다름 아니라 미국의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F. Fitzgerald·1896~1940)였다. 이 대목에서 다름 아니라 무려 백 년 전의 소설가의 소설을 떠올린 것에 대해 다소 의아하실 분도 있겠지만, 이 영화 ‘기생충’과 스콧 피츠제럴드의 예를 들어 ‘위대한 개츠비’같은 작품은 분명 백 년의 시대적 차이를 걸쳐 두고 있으면서도 비슷한 예술적 전형을 공유하고 있다. 분명 앞선 시대 부르주아 자본주의계급의 천박한 문화를 비판했던 에두아르 마네(<00C9>douard Manet·1832~1883)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자본주의 문화적 상징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서 시작된 것이면서, 부르주아의 문화적 소비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소비를 강화한다는 이중적 양식을 보여준다는 동일한 예술적 이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1920년대 초반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닉 캐러웨이’는 예일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인물이고, 이제 주식과 채권을 공부하여 자본주의 경제로 편승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이웃에 사는 ‘제이 개츠비’를 알게 되는데, 그는 엄청난 부자로 매일 파티를 열고 있으며, 아무도 그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는 비밀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개츠비’의 파티 속에서 미술작품이나 음악, 책을 매개로 한 지식 등은 모두 진지함이 아니라 ‘개츠비’라는 부르주아의 이상을 실현한 가장 완전무결한 취향을 가진 대상을 의심하기 위한 계기로 활용된다. 파티에서 ‘개츠비’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이 모두 진짜라고 놀라워하는 대목이나 ‘개츠비’의 재즈에 대한 취향을 보여주는 ‘블라디미르 토스토프’의 최신작을 연주하는 대목 역시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개츠비’는 기대와 의심, 그리고 취향과 감식안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자본주의적 상징이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그 상징에 매혹되어 그의 비밀스러운 삶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말하고, 어떤 이들은 그가 갖고 있는 엄청난 자본의 근원이 불법적인 밀수에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시도한다. 결국 이 ‘위대한 개츠비’의 서사는 바로 실체 없는 상징과 상징 없는 실체 사이에서 일어난 욕망과 다툼이 초래한 개츠비의 비극 위에 조립되어 있는 셈이었다.

2003년 민음사에서 김욱동의 번역으로 출판된 ‘위대한 개츠비’.
2003년 민음사에서 김욱동의 번역으로 출판된 ‘위대한 개츠비’.

이 ‘위대한 개츠비’와 달리 영화 ‘기생충’에는 닉 캐러웨이 같은 ‘진실한 친구’ 혹은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는 관찰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작가의 서사에 대한 관점 내지는 미학의 차이이며, 사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존재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마치 ‘개츠비’에게 집약되어 있던 자본주의적 취향과 자본력은 각각 나뉘어 그 사이의 물고 물림으로 표현된다. 사실 백 년 사이가 만들어낸 서사의 변화라고 한다면 약소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우리의 의식 속 어떤 부분은 결코 쉽게 변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이 백 년의 시간을 걸쳐 연결된 소설과 영화 속에서 겉으로는 반짝반짝 거리는 상징의 세계는 사실 엄청나게 매혹적이지만, 또한 엄청나게 허약하다. 쉽게 균열을 일으킨다. 이는 ‘자의식’ 같은 것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가져왔던 버리기 어려운 삶의 습관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은 그것을 감각적으로, ‘냄새’로 표현한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개츠비가 남긴 수첩 속에 빼곡하게 적혀 있던 계획표로 표현했던 것과 꽤 달라 보이지만 사실 같은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 반짝반짝 빛나는 상품의 상징이 호명하는 취향에 매혹되면서도 살아나가는 절박감에 의해 균열과 파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 상징이라는 거미줄에 걸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