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복수를 꿈꾼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한 번쯤은 복수를 꿈꾸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겪는 모든 것에 미숙했던 시기에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상처받고, 때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기도 하고, 가끔 자신이 가진 일부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돈이나 집 같은 유형의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나마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나은 것이고, 가족이나 친구 같은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인간 사이의 관계를 박탈당하는 것은 더욱 끔찍하다. 하물며 내가 인간임을 유일하게 증명해주는 자존심은 어떤가. 자만심이나 질투에 의해 인간
어딘가에 가서 무언가 여기와는 다른 것을 경험하는 것을 여행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여행하는 마음과 책을 읽는 마음은 꽤 상당히 닮아있다. 여행이 적절한 기간을 두고 시작하는 지점에서부터 끝나는 지점까지 이동하면서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만나거나 하는 것이 여행하는 마음이라면, 책의 첫 장을 펼쳐 그 속에 들어앉아 있는 언어들을 통해 지금 여기 없는 것을 상상하도록 하는 것은 책을 읽는 마음이다. 결국 책의 마지막 장을 닫고 책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우리는 여행에서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로 돌아오는
가끔은 스치듯 지나가는 단어가 마음속에 들어와, 나가지 못하고 한참 동안이나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다. 책에서 툭 떨어진 한 낱말이 일으킨 감정의 파문이 오랫동안 계속된다. 누군가 쓴 글의 일부였던 그 단어는 그것이 본래 들어 있던 맥락으로부터 빠져나와 불의의 순간에 그것을 읽는 내 맥락 속으로 뛰어든다.가끔은 어떤 문장이 유독 머리에 맴돌아 그 짧은 문장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고작 몇 개의 단어를 엮었을 뿐인 그 문장은 머릿속에 그림처럼 새겨져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분명 누군가
어떤 이야기는 우리를 끝도 없는 공포의 감정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참혹하고 무서운 장면을 담고 있는 영화나 게임은 우리에게 즉각적인 공포를 불러오지만, 무서운 이야기는 그것을 듣는 우리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상상의 씨앗을 돋워 올려 좀 더 근원적인 공포와 마주하도록 한다. 어린 시절 누군가가 들려주었던 무서운 이야기가 주는 오싹함에 코 끝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으리라.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따뜻하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괴담 같은 공포를 주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공포란 언어를 통해 전달될
우리의 삶은 단단한 현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눈을 조금만 돌리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대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고,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는 대상은 금방 그 존재를 잊어버리지만, 도무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것, 도무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공포를 집어 먹는 존재이다.내가 익숙하게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 도시 알 수 없는 요소들이 끼어들어 그것이 더 이상 낯익은 대상이 아니게 되면, 그 관계는 공포가 된다. 철근콘크리트나 나무 같이 단
겨울이 오는 듯, 스산한 바람이 들기 시작하면, 왠지 대학 시절 읽었던 김승옥의 작품 속 문장들이 생각난다. 그때는 그 사소한 문장 한 줄이 대학에서 교수가 전해주는 지식보다도, 매일 밤새도록 함께 술을 마셔주던 친구들보다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 같은 기분을 주었다. 누구에게나 가끔씩 찾아오는,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온통 잿빛으로 가득한 그 문장이 내 마음에 손을 내밀어 모종의 위로를 주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없는 문장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렇게 겨울 공기에 섞인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
산보, 혹은 산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 중에서 가장 간단하고도 그 의미가 깊은 활동이다. 어딘가에서 어딘가까지 때로는 목적을 가지고, 때로는 목적을 갖지 않고 걸어가면서 무언가를 보는 산보는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닌가.모니터에 머리를 박고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잠시 미뤄두고 10분 정도라도 바깥의 주변을 산보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풀리는 경우도 있다. 어딘가를 걷는 것은 나의 삶에 붙은 자연스러운 맥락을 잠시 바꾸는 행위이다.1930년대 독일 문학을 전공하고, 해외문학파
가끔씩, 망각하긴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아이였던 때가 있다. 단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 때의 기억은 대부분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했는지 알 수 없는 이해불가의 영역뿐이다. 그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렸고, 그렇기에 어떻게 말하거나 행동하는지 몰랐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묻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까닭일지도 모른다.우리는 흔히 아이들이 이유 없이 어떤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편견일 것이다. 아이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얼마 전 스웨덴 교육 당국은 태블릿으로 대표되던 디지털 교육 방식을 버리고, 다시 교실에 종이책과 연필을 비치하고 독서와 필기 연습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교육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지금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문자나 이미지적 정보 어떤 것이나 디지털로 옮겨질 수 있는 시대지만, 아이가 앞으로 배워갈 세상이 모두 디지털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 만큼, 반가운 의미를 지닌 결정이라고 생각한다.인간이 영위해온 모든 세계의 기반이 디지털 네트워크로 옮겨지면서, 종이 위에 연필로 사각거리던 감촉이나, 우둘투둘한 캔버스 위에
소설을 원작으로 그것을 영상화하는 경우는 대부분 주인공에 어떤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더라도 소설 속 주인공에는 미치지 못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소설의 주인공이란 본디 독자의 꿈속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독자가 꿈꾸는 소설 속 나만의 주인공을 현실 세계의 누가 따를 수 있을 것인가. 꿈과 경쟁할 수 있는 현실이란 본디 존재할 리 없는 것이다.하지만, 간혹 먼저 나온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도 마치 그것 먼저 존재했던 것처럼 우리의 기억의 선후 관계를 바꾸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 소설 원작이 있다고 말하면 깜짝 놀라게 되는
‘나도향(羅稻香)’이라고 하면,‘뽕’이나 ‘벙어리삼룡이’처럼 향토적인 색채 짙은 작품을 몇 편 썼던 작가로만 기억하시는 분이 많으실지 모르지만, 사실 그는 신문에 본격적인 연애소설을 최초로 연재했던 사랑의 작가였다. 나경손(羅慶孫)이라는 본명을 두고, 소설을 쓸 때는 주로 벼의 향기라는 의미의 ‘도향(稻香)’이라는 필명을, 번역이나 평론을 쓸 때는 주로 ‘나빈(羅彬)’이라는 필명을 썼다.생원집에 하인으로 있던 벙어리 ‘삼룡이’가 주인집에 시집온 아씨가 부당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참다못해 복수하는 이야기나, 누에 먹일 뽕나무잎
인간이 글쓰기로 무언가를 표현해 온 역사는 꽤 길 것만 같지만, 그것은 그리 길지만도 않다.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무언가에 대해 느끼고, 배우고, 말로 그것을 표현하고, 또 글로 그것을 표현해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이제 무언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쯤에는 인간의 감각은 둔해지고, 지력은 쇠퇴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예술 중 문학이라는 것이 늘 기괴한 착상과 화려한 수사로 점철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그렇게 단순하기 그지 없는 세계로 돌아오고 마는 것은 그것이 인간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내뱉는 말과
계절이란 마치 공기 같아 그 변화라든가 그것이 주는 미묘한 느낌은 항상 감각 안에 포착되는 것은 아니다. 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어린 시절, 앞만 보고 살아가는 와중에는 전혀 그 변화를 자각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살아가기도 바쁜 와중에 그 찬찬한 변화까지 눈과 귀에 담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좀 더 들게 되면, 유독 계절이 새삼스러워지는 순간이 오게 된다. 나뭇가지 끝에 보송거리는 조그만 솜털이 눈에 보이거나, 살갗에 달라붙는 수분 가득한 공기가 계절의 변화를 보여준다.이럴 때면, 어린 시절 뭐가 좋은
미디어 학자인 빌렘 플루세르(Vilem Flusser)는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하고 질문했던 적이 있다. 물론 플루세르는 이 글쓰기를 책이라는 미디어와 더 관련시켜 논의하고 있긴 하지만, 글쓰기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감각적 이미지의 저장장치와 전송속도의 발전으로 인해 어떤 인간의 감각과 다른 인간의 감각 사이를 연결하는 추상적인 형태의 글쓰기는 사실 그 매개로서의 역할을 잃어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카페나 대중교통 안에서 글쓰기가 아닌 영상으로 사유를 배운 유튜브-네이티브들이 모두 제각기 스마
지금 우리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어린 시절 사랑이란 빠질 수밖에 없는 감정의 상태이니, 그것이 지금 사라져버렸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각각의 인간의 한계를 넘어 저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에 대한 마음의 급격한 움직임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누군가는 각자 생존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한다. 학생들의 삶은 미래의 더 나은 생존을 준비하느라,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
동네마다 자리했던 슈퍼나 작은 구멍가게들을 대신해 어느새 전국 곳곳에 모두 같은 모양과 같은 구성을 하고 있는 편의점이 들어찬 시대가 되었다. 밤새 운영한다는 의미의 ‘편의(convenience)’는 이미 우리의 일상에서 당연한 것이 되고, 이젠 편의점 없는 한국 사회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난 뒤 남아 있는 한국 사회의 풍경을 회고한다면, 아파트와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빼고는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었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에 맞는 시대적 상징이 되는 공간이 존재한다면, 편의점
어느새 여름이 되었다. 짤막했던 봄은 어디론가 길가에 수북히 떨어진 꽃들과 함께 지나가 버리고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잠깐씩 느껴지던 냉기조차 사라져 후덥지근한 땀이 느껴질 때쯤이 되었다. 계절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인간됨을 확인하는 의례인 것만 같아 가끔은 노력을 기울여 계절의 변화를 느끼려 애쓴다. 계절이 바뀌면 기후도 바뀌고 그속에서 숨쉬는 인간도 바뀌는 것이다.지금까지 인간이 발전시켜온 기술들은 계절을 거슬러 여전하고 항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준다. 당연히 에어컨디셔너나 냉장고가 없는 여름을 생각하기 어렵고
우리 세대에서 가장 통찰력 있는 이미지 비평가 중 하나인 존 버거는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하는 질문을 통해, 동물원에서 인간이 동물을 관찰하는 것에 담겨 있는 의미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인간은 동물원 안에 갇힌 동물들을 보러가지만, 정작 그곳에 진정한 동물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원에서 우리는 인간과 친밀한 동물의 모습을 보러가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동물원 속의 동물과 인간의 구별된 모습에 불과하다. 인간의 시선을 통해 만들어낸 구경이라는 행위의 가치는 제도의 한계를 벗어나 그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 될 수
바야흐로, 복수의 시대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자기가 겪었던 부당한 상처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결국 복수하고야 마는 이야기가 넘쳐 나고 있다.어느새 드라마 ‘더글로리’가 다루는 복수는 우리 모두의 욕망이 되었다. 일찍이 이청준은 소설 ‘벌레이야기’에서 복수와 용서의 역설을 다뤘고, 이창동 감독은 ‘밀양’에서 이를 곱씹었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에 대한 영화 3부작을 통해 복수라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행위에 대해 이성적이고 지적인 성찰을 행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복수의 서사는 좀 더 직접
우리에게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 외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의 얼굴 앞에 붙어 있는 두 개의 눈은 인간이 향하는 앞의 길만을 보도록 제약한다. 우리 인간은 어딘가 거리를 걷고 있으면서 동시에 걷고 있는 우리를 볼 수 없는 숙명적 제약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마음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그가 속해 있는 시대나 사회가 흘러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애초에 역사나 통계처럼, 내가 속해 흘러가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가늠하거나,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불투명한 군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