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역사는 한 국가와 민족의 뿌리이며 줄기이기에 진실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사실로 기록이 돼야 한다지만, 그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 시대를 달리하거나 집단이나 계층, 지역이나 개인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E. H 카(1892~1982)는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역사가가 해야 될 일은 ‘다만 진실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 지식론을 비판하며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가 그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야 의미를 얻는 것이다”라고 했다.

중국의 진시황에 대한 재평가의 일례를 보면, BC 241년부터 BC 210년까지 재위 동안 대규모 문화탄압과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킨 중국사에서 최대의 폭군으로 배웠으나,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의 중국국가의 기본 토대를 만든 위대한 업적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서갱유는 재위 34년이 되는 해(BC213)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남월지 정벌 축하잔치에서 부사 주청신과 순우월의 의견충돌 와중에 승상 이사(李斯)가 끼어들면서 일어났다. 이사의 의견은 구제도와 사상은 통일국가에서 혼란만 가중시키므로 진나라 기록이나 유가의 경전, 제자백가 이외의 서책을 전부 없애기를 제안한 것이다. 갱유(坑儒) 또한 진시황 35년(기원전 212년)에 불로초를 찾으러 보낸 방사(方士) 두 사람이 진시황이 권력을 탐해 독단적으로 결정한다고 비방하고 재물을 사취해 도망가는 사건이 계기가 되어 유생(儒生) 400여 명을 죽였다. ‘사기, 유림열전’에는 이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면서 ‘술사(術士)를 묻었다’고 언급했다. 술사는 유생과 다르며 방사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 고대에 신선방술을 신봉하던 사람들로 생(生)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의 경우는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가 배운 사도세자가 죽은 이유는 당쟁의 희생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살인자였다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세자의 위치에서 100여명을 넘게 살해한 사례는 동서양 역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한양굿이나 경기도당굿에서는 지금도 사도세자를 별상이라며 모신다.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원혼이 아직도 무속인들에게 신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부산물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반공건국과 경제개발, 민주화로 이어진다. 5·16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후퇴했으나 경제 산업화 면에선 성공해 국민들의 가난을 일소해버렸다. 군사정권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그 통치결과는 IMF경제위기라는 국가를 부도내고 그 고통을 국민들에게 떠넘겼다. 차기정부에서 국민들은 힘을 모아 부도사태는 해결했으나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의 고통으로 남아 있다. 이후 정권이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면서 역사교과서는 국정과 검정을 오가며 역대 통치자들의 공과(功過)에 대한 냉철한 평가는 간데없고 지난 정부를 폄훼하며 이념적인 내용만 가득 차 너덜거린다.

제1야당 일부 의원들이 내뱉은 5·18 민주화운동 폄훼발언이 이들에게 어떤 정치적 이익이 담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도를 넘었다. 하지만 이들이 의구심을 갖는 석연찮은 5·18유공자 선정과정과 명단공개에는 국민적 공감대가 큰 것 같다. 보훈처는 작년 말 기준 4천415명이라 발표했으나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이러한 사건은 선정과정과 명단을 투명하게 발표함으로써 성숙된 민주사회를 만들 수 있다. 지금 여당에서 ‘5·18 왜곡 처벌 특별법’을 추진하려는 황당한 발상은 군부독재의 ‘유신헌법’발상과 별다를 바 없다. 이런 행태는 ‘정치의, 정치인에 의한, 정치인을 위한 정치’를 민주주의 정치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자세는 국가관과 인간관 그리고 이념체계와 직접 관련되기에 다양한 각도에서 다른 해석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지도자와 국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총체적 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