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여성 독립운동가들
조국 광복의 밑거름으로
고문으로 두 눈까지 잃고
단지 혈서 쓰고 무장투쟁
임청각 종부 故 허은 여사
광복절 맞아 정부 포상

‘독립운동가’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누구일까? 안중근, 이상룡, 윤봉길, 김좌진…. ‘여성 독립운동가’하면 유관순을 빼놓고는 쉽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다수의 경북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일제강점기 36년간 다방면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사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던 사실이 본지 취재 결과 밝혀졌다. <관련기사 4면>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 따르면 13일 현재 정부에서 독립운동가로 인정한 유공자는 총 1만4천800여 명이다. 이중 여성 독립유공자는 299명으로 2%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대구·경북 출신은 12명이다. 15일 열릴 ‘제73주년 광복절 및 정부 수립 70주년 경축행사’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고(故) 허은(1907∼1997) 여사가 정부 포상을 받으면 도내 여성 독립유공자는 13명으로 늘어난다.

경북 여성 독립운동가의 본격 태동은 국채보상운동으로 시작됐다. 대구의 유지부인 7명이 1907년 2월 23일 결성한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시작으로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경주국채보상부인회 등이 조직됐다. 그 뒤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30여 개의 여성 국채보상단체가 만들어졌다. 개인 의연자(義捐者)도 두드러졌다. 예명이 앵무인 기생 염농산(1889∼1946)은 독립운동가 서상돈(1850~1913)과 똑같은 액수(100원·당시 집 한 채 값)를 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나이가 18세였고 30세 때는 성주군 용암면에 홍수방지 제방을 쌓게 거금을 쾌척했으며, 1938년에는 폐교 위기에 몰린 대구 교남학교에 전 재산의 절반인 2만 원을 내놓았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즈음해 일어났던 기생들의 독립만세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거족적인 민족운동이었던 1919년 3·1운동에서 경북의 여성들이 큰 몫을 담당했다. 남자현·김락·신분금·윤악이·임봉선·김정희 등이 3·1운동에 나섰다. 영양 출신의 남자현(南慈賢 1873∼1933)은 만 46세가 되던 1919년 2월 서울로 가서 3·1독립만세에 참여했다. 안동의 김락은 만세를 부르다가 붙잡혀 고문을 받아 두 눈을 잃기도 했다. 영덕의 신분금과 윤악이는 지품면 원전동에서 만세를 불렀고, 칠곡 출신의 임봉선은 대구 신명여학교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영천의 김정희는 혈서 깃발을 만들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앞장서 외쳤다. 3·1운동 직후 여성들의 민족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특히 비밀리에 항일단체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나섰는데, 경북 여성 가운데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대구지부장으로 활약한 유인경(성주)이 있다.

남자현은 경북 영양 출신이자 만주에서 의열투쟁을 펼친 한국 여성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24세 때 의병 전투를 치르던 남편을 잃고, 38세 때 나라를 잃었다. 경북 안동과 영양을 오간 대학자 집안의 유학(儒學)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투철한 교육자이기도 한 부친 아래에서 사서삼경을 배웠고 전시대를 관통해온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익혔다. ‘혁명의 어머니’‘전율할 노파’‘근대 한국의 여걸’로 불렸던 남자현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일제에 맞섰다. 독립운동의 방략에서도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에 이어 의열투쟁을 펼쳤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그가 걸었던 투쟁의 길은 남성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거침없는 단지와 혈서 쓰기, 일제 요인을 겨냥한 의열투쟁, 마지막 단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올곧은 뜻과 강력한 추동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밖에도 민영숙(상주)·전월순(상주)·김봉식(경주)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했다.

3·1운동 이후 경북에서 여성들의 권익 향상과 민족의 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진취적인 여성들이 등장했다. 계층과 연령도 다양했다. 이들은 농민·노동·여성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며 새로운 도전을 이어갔다. 70세 중반의 나이에 안동 풍산소작인회 집행위원이 된 농민 강경옥(姜敬玉 1850∼1927)과 기생출신으로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이 된 정칠성(丁七星 1897∼1958)은 대표적이다. 1930년대 여성운동은 독자적으로 여성단체를 조직해 활동하기보다는 농민·노동·학생 운동과 연계해서 이뤄졌다.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운동, 그리고 반제·반전운동 등이 주류를 이뤘는데, 안동에 뿌리를 둔 이효정(李孝貞)과 이병희(李丙禧)의 노동운동이 눈길을 끈다.

나라 밖에서도 진취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사진 신부로 하와이로 건너가 미주지역의 여성단체를 이끌었던 이희경(대구)과 중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김노숙(안동)이 그들이다. 이들은 뜻을 세우고 시대에 앞서 새로운 여성의 길을 열어갔다.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여성들은 부지기수다. 특히 만주지역 항일투쟁사에서 이런 값진 희생이 많았다. 1910년 나라를 잃자, 경북의 많은 애국지사가 만주로 망명할 때 수많은 여성이 함께했다. 임청각(석주 이상룡 생가)의 종부 3대, 일송 김동삼의 부인 박순부와 며느리 이해동, 추산 권기일의 아내 김성, 배재형의 부인 김씨부인 등 숱한 여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저 남성을 따른 것이 아니라 낯선 땅 만주에서 독립 운동가를 보필하는 것이 곧 나라를 찾는 ‘절의의 길’이라는 뜻을 세우고, 눈앞에 닥친 운명을 강인하게 헤쳐나갔다. 이상룡의 부인 김우락은 자신의 만주생활을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었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충절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해동은 시아버님께서 국권 회복을 위해 세운 공이 있다면, 그 속에는 시어머님 몫도 있다고 당당히 밝혔다.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은 “경북은 유교적 전통이 강해 독립운동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유공자로 서훈 받은 여성이 전국 여성 포상자 299명 가운데 12명에 불과하지만 전통의 덕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조국 광복에 밑거름이 된 여성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말했다.

/손병현기자why@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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