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19세기의 조선은 17세기 이후 조금씩 밀려오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조류가 본격적으로 큰 파고를 일으키던 시기이다. 이 19세기를 대표하는 최한기(1803~1877) 선생은 정약용, 김정희와 함께 기존의 동서양의 학문적 업적을 집대성했으며, 한국의 근대사상이 성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 실학자이며, 개화사상의 가교자이다. 또한 조선의 미래를 걱정한 당시의 대 지식인으로서의 최한기 선생은 조선시대 인사행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그의 저서 `인정(人政)`에서 `남을 꾸짖음(責人)`을 기술하고 있다.

누군가를 꾸짖는다는 것은 그의 잘못을 바로잡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남을 꾸짖으려면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이 있어야 하며 본인의 감정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이익을 계산해서도 안 되며, 지위와 힘을 내세워서는 더욱 안 된다. 결국, 꾸짖는 사람이 공명정대하고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말이니 다른 사람을 꾸짖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편협된 개인 생각으로 남을 꾸짖으면 상대방이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이는 남을 궁지로 몰아넣어 피할 길이 없게 하기 때문이다. 너그럽고 공정하게 남을 꾸짖으면 상대가 화를 내는 경우는 드물다. 이는 상대에게 주선(周旋)할 길과 변통할 방도가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정한 사람이라야 그 잘못됨을 교화시킬 수 있다.

`대개 남을 꾸짖는 데는 일정한 기준을 토대로 하여 남과 나를 달리해서는 안 된다. 자연의 운행 원리를 거스르면 꾸짖어서 따르게 하고, 국가와 사회의 안녕을 해치면 꾸짖어서 돕게 하고, 사람의 도를 닦지 않으면 꾸짖어서 익히고 행하게 해야 한다. 이는 천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행하는 도리요, 나 혼자 행하는 일이 아니다. 남을 꾸짖어서 감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 쓰는 방법도 알 것이다.`라고 기록한 최한기 선생의 말에 새삼 고개가 숙연해 진다.

공적인 조직이나 직장에도 꾸지람은 존재한다. 업무와 관련된 실수를 하거나 조직에 손해를 입힌 경우에 받게 되는 질책이나 문책 또는 징계가 그것이다. 직위에 따라 상하관계가 정해져있는 조직사회에서의 꾸지람은 보다 체계적이고 공식적이다. 그것은 각 조직의 관리시스템에 따라 행해지며 동일한 행위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원칙이 있다. 때문에 이러한 형평성이 전제가 되므로 직장에서 공적으로 행해지는 꾸지람을 구성원들은 불평 없이 수용하는 것이다. 조직 내에서의 꾸지람이 공정하지 않는 경우는 관리자의 성향이나 지위, 관련된 인물에 따라 달라져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업무상의 실책일지라도 적정선을 넘거나 인격적인 모욕이 느껴지는 꾸지람이라면 그 정당성을 잃는다. 관리자가 폭력적인 꾸지람으로 자신의 인격을 실추시키고 조직까지 위태롭게 하는 경우는 그 꾸지람이 공정하고 타당한 명분과 절차에 따라 상식적인 선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점을 망각해서 생긴 일이다.

우리의 정당정치에서 상대에게 나타나는 꾸지람의 행태는 편협한 사람이 남을 꾸짖을 때와 같다. 즉 상대가 자신의 개인욕심을 따르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낸다. 은밀함을 좋아하고, 항상 남들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겉으로는 아첨하는 태도를 짓지만 몰래 남을 해치는 습성을 감추고 있으니, 남에게 꾸지람을 받기에도 바쁠 텐데 되레 타당을 꾸짖고만 있으니 가히 막장정치의 정수를 보는 것 같다.

지난 20대 총선은 세월호사건, 국정교과서, 공천파동 등 이슈들이 합쳐져 당시 기고만장하던 집권당은 결국 국민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당했다. 그 여파로 대통령탄핵까지 몰고 왔으며 지금은 대안 없는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이번 북한의 통일전선부장인 김영철의 방남을 두고 여야가 서로 `내로남불`이라고 비판하는 고질적인 당쟁행태를 국민들은 보고 있으니 그 꾸지람의 정도는 6·13지방선거에서 곧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