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품은 낙동강 이야기 ⑷
구미공단, 전자산업 최적의 조건

▲ 구미공단이 조성되기 전 임수동 일대의 모습. /구미시 제공

1969년 전자산업 육성 위해 조성된 국가산업단지
우수한 지내력과 낙동강·구미천 등 용수 풍부
바다의 염분 없는 내륙 입지…천혜의 산업환경
`한국의 실리콘밸리` 자리매김


□ 전자공업 육성만이 살길이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피폐해졌던 한국의 경제는 4.19와 5.16을 거치면서 고도의 성장을 이루는 전기를 마련한다.

특히, 5.16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막대한 재원이 필요해지자 내수보다 수출을 지원하는 방향의 경제정책에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수출지원정책에 의해 1960년대 수출은 10년동안 무려 23배나 증가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수출증가에도 불구하고 외화 가득률의 저하, 수출상품의 단순성, 첨단기술의 부재 등의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수출정책은 양적 측면에서 질적 측면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특히, 일본이 1964년 올림픽을 개최한 이후 전자산업의 육성으로 빠른 경제 성장을 하는 모습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정부는 1960년대 말부터 최첨단 산업인 전자공업을 수출 전략품목으로 육성해 중진국 대열에 진입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국가경제 핵심과제로 설정한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세계적인 불황과 경공업 위주의 취약한 국내 경제구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경제 성장 속도는 눈에 띄게 둔화되고 있었다.

여기에 선진국들마저 계속되는 불황으로 다양한 무역장벽을 쌓아 개발도상국의 수출을 막았고,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은 국내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정부는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온 결론이 바로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토대로 전국 각지를 대상으로 전자공업과 함께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산업기지 입지조사에 착수한다.

당시 수자원개발공사는 4대강 유역 조사사업 자료를 토대로 구미지역이 최적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 현재의 구미공단을 항공촬영한 모습.<br /><br />/구미시 제공
▲ 현재의 구미공단을 항공촬영한 모습. /구미시 제공

□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구미공단

구미국가산업단지(이하 구미공단)는 1969년 1월 3일 `구미공업단지 설립추진대회`를 기반으로 같은해 6월 4일 공업단지사업시행자를 지정(건설부 고시 제321호)함으로써 대역사가 시작됐다.

전자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조성된 구미공단은 구미시 공단동, 산동면, 칠곡군 일원에 위치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미에 국가공단이 조성된 이유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기 때문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보다 구미지역이 전자산업공단을 조성하기에 가장 좋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공단이 조성되기 전 이 지역은 넓은 평야로 대부분 경작지였고, 약간의 구릉지(해발 50m)를 낀 지역도 있었다.

동편 낙동강 제방쪽은 하상지역(河床地域)이었다. 제1단지는 야산 개간지역과 전답 매립지역, 하상 매립지역의 세가지 형태로 구분됐다.

일부 사람들이 구미공단이 모래땅 위에 선 공단으로 말하는 것은 제1단지 총 면적의 10% 정도의 모래땅이 전자단지 제3공구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제1단지 부지의 80%이상이 전답이었고, 10% 정도가 야산, 나머지 10% 정도가 낙동강 유역과 하상이다.

토질을 살펴보면 전답매립지역은 원래 실트(silt, 모래와 점토 중간의 고운 입자)질 점토였고 그 위에 실트(silt)질 모레로 매립해 지내력(地耐力, 하중을 받치는 지반의 능력)이 우수한 편이다. 반도체 등의 첨단산업에 있어 지내력은 반드시 갖춰야할 필수조건이었다.

여기에 낙동강을 비롯해 그 지류인 구미천 등의 풍부한 용수가 공급되는 점도 큰 장점이었다.

특히, 낙동강의 수질은 Ca+, Mg+의 함량이 비교적 많아 염색에는 약간의 지장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판정받았으나, 염색업종이 없는 구미공단의 경우 전 입주업체가 양질의 용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 내륙에 입지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 전자산업의 특성상 염분이 많은 바람에 의해 부품의 정밀성과 생산공정에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임해지역의 공단은 피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1㎥당 10개의 먼지도 허용할 수 없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최첨단 전자업종의 생산공정에 있어 금오산 등에 의해 둘러싸여 분지 지형의 구미는 중국의 황사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더할나위 없는 최적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이밖에도 편리한 교통만과 인근 지역의 가용노동력도 한 몫을 했다. 공업화 이전의 구미지역 인구는 1968년 기준 2만1천357명 정도에 그쳐 대규모 공업단지에 필요한 풍부한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지만 선산, 칠곡, 김천 등지의 유휴인력이 풍부했다. 특히, 대구는 사회·경제적으로 구미를 세력권에 두고 있었으므로 고급인력 확보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 총 공사비 13억원을 들여 1974년 12월 준공한 구미대교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br /><br />/구미시 제공
▲ 총 공사비 13억원을 들여 1974년 12월 준공한 구미대교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 /구미시 제공

□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구미공단

구미국가산업단지를 논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빼놓을 수는 없다. 수출지원에 중점을 둔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구미공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치철학인 `빈곤으로부터의 탈피`와 `자립경제의 달성`이라는 이상의 실천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구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점으로 인해 구미공단이 건설되었다고 말한다.

구미에 구미공단이 들어서는데 있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구미지역은 자연적, 지리적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지역민들의 유치 노력과 희생이 뒤따랐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구미공단 유치가 결정되기 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에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는 것에 대해 정치적 부담을 많이 느꼈다는 이야기도 있다.

코오롱 창업주인 이원만 회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석에서 구미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에 반대했다. 자신의 고향이라는 이유에서다.

이에 이 회장은 “구미에 공장을 짓는 것은 각하의 고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입지여건이 좋기 때문이다. 고향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머물면서 구미공단 조성을 계획하고 독려했던 구 영빈관의 모습. 지금은 LG전자가 인수해 그룹 임직원들의 화합과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머물면서 구미공단 조성을 계획하고 독려했던 구 영빈관의 모습. 지금은 LG전자가 인수해 그룹 임직원들의 화합과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원만 회장은 구미에 한국폴리에스텔(코오롱)을 설립해 구미공단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고향이라는 이유로 처음 부담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구미공단 조성이 결정된 후에는 누구보다도 애착을 가지고 도움을 준 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공단을 조성하기 위해 그 기반 시설들이 하나 둘씩 조성될 때마다 현장을 찾았다. 구미대교 준공식에도 직접 참석해 공단조성에 차질이 없도록 꼼꼼히 살피기도 했다. 또 지금의 산호대교가 있는 비산에 영빈관(迎賓館)을 지어 그 곳에서 지내면서 구미공단 조성을 계획하고 독려했다.

이렇게 조성된 구미공단은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며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오고 있다. 구미공단은 1974년 7천900만달러 수출을 기록한 이후 1년만에 수출 1억달러를 돌파했고, 2005년에는 수출 300억달러를 넘어서는 기염을 토하면서 명실상부한 한국 산업을 선도하는 중심 공단으로 자리매김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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