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④
새마을운동가 구술생애사 채록
이화자 전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下)

▲ 1997년 새마을중앙회에서 열린 시도, 시군구 새마을 연찬회 모습.
▲ 1997년 새마을중앙회에서 열린 시도, 시군구 새마을 연찬회 모습.

2001년 북한돕기 통일손수레 전달
신의주서 본 북한주민 모습에 충격
새마을운동의 힘 새삼 느껴

새마을부녀회는 관변단체 아니야
`더불어 잘살자` 정신 실천하는 단체
더 똑똑한 젊은이들이 잘 계승해주길

△ “끝까지 봐주꾸마” 남편 말에 힘 얻어

1983년부터 1988년까지 구미시 부녀회장을 나름 열심히 했어요. 그 부녀회장직을 마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약국에 매진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도에서 부녀회장을 맡아달라는 거에요.

시 부녀회장은 그래도 가까이 계시는 분들도 있으니까 약국을 운영하면서 여러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었는데 도는 범위가 다르잖아요. 너무 넓어요. 늘 약국에서만 대하던 그런 거하고는 천지차이잖아요. 그래서 몇날 며칠을 고민만 하다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새마을단체에 계시던 분이 매일 약국으로 찾아오시기도 했어요.

또 당시 저희 남편이 구미시의회 의장을 맡고 계셨는데 계속 전화가 왔었나봐요. 전화가 와서 “당신 부인이 약국만 하고 새마을을 안하려 하는데 같이 나와서 활동할 수 있도록 좀 설득해 달라”고 그랬나봐요. 그런 전화가 많이 왔었대요.

그래서인지 한 날은 남편이 “내 끝까지 봐 주꾸마. 고마 수락하고 한번 해봐라”하더라구요. 남편의 그런 말에도 사실 많이 망설였어요. 왜냐하면 새마을 지도자라는 것이 영광은 한 10%이고 고생은 90%거든요. 이 고생을 감내해야하는데, 그 용기가 쉽게 나지가 않더라구요. 그래도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1997년부터 2003년도까지 경상북도 새마을 부녀회장을 맡았어요.

△ 설거지하는 경북도 부녀회장

80년대 초반에 중앙본부에서 야시장을 운영했었어요. 새마을운동본부가 있던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서 새마을 야시장을 했었거든요. 야시장이니까 각 지역에서 특산품을 가지고 판매를 했어요.

당시 난 구미시 부녀회장이니까 우리 구미를 대표하는게 전자산업이라고 생각해 처음에는 전자계산기를 가지고 갔었어요.

근데 서울하고 비교하니까 조금 떨어지는 거에요. 그러니 판매도 잘 안되는 거에요. 그 다음해에는 참기름을 짜서 가지고 갔는데 옆 다른 지역에서 참기름을 바로 짜서 주더라구요.

사실 포장도 차이가 많이 나고. 구미 대표 농산물을 잘 몰라 참 망설여 지더라구요. 그러다 내가 도 부녀회장으로 다시 야시장을 갔는데 선산 지역에서 약주를 가지고 가서 판매를 하는 걸 보니 마음이 편하더라구요.

일주일 정도 야시장을 했는데 당시 포항은 특산물로 물회를, 안동은 식혜와 안동소주 등을 판매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릇이 산더미처럼 밀려도 아무도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 없는 거에요.

전부 다 나서서 판매만 할라고 그러지 설거지는 아무도 안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설거지를 했어요. 즉흥적으로 설거지를 맡아서 했죠. 하루종일 설거지만 하니 사람들이 `설거지하는 회장`으로 불렀어요.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설거지하는 회장`이라고 하면 경북도 부녀회장이란걸 알 정도였으니까요.

 

△ 북한돕기 통일손수레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거라면 바로 2001년 북한돕기 통일손수레 전달이에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고조된 남북화해 분위기 속에서 2001년 새마을운동 중앙회가 추진한 북한돕기 운동이었어요. 새마을운동 중앙회가 추진하기는 했지만 그 운동이 전 국민이 함께 동참한 운동이었죠.

아마 성금이 당시 10억원이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우리가 새마을운동 당시 농촌지역에 손수레 같은걸 보급했듯이 북한에도 농기구나 생산한 쌀을 운반할 수 있도록 `통일 손수레`를 만든거죠.

그걸 만들어 중국 단동을 거쳐 압록강 철교를 통해 신의주로 들어갔어요. 당시 전달하러 간 사람이 전국에서 새마을 지도자 중 남녀 한명씩 두사람하고, 중앙에 있는 국장님 한분. 총 세명이 갔었어요.

그걸 신의주에 가서 직접 전한거죠. 거긴 시골이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직접 그 손수레를 사용하는건 보지 못했어요. 북한 사람들이 데리고 가지 않았으니까. 우리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북한 사람들이 항상 옆에 붙어 같이 다녔어요.

그런데 통일 손수레를 전달하고 압록강을 건너가려는데 못 건너게 막는거에요. 너무 놀랬죠. “왜 못 가느냐”고 물어보니까 바로는 대답을 안해주고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 말해주더라구요.

그때 미국 뉴욕에 있는 쌍둥이 빌딩이 테러를 당한거에요. 9.11테러. 그러니 경계가 삼엄해 진거죠. 그렇게 몇 시간을 더 기다리다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어요. 시간은 몇 시간이었지만, 당시 나에겐 정말 긴 시간이었어요. 그렇게 시간이 길게 느껴 본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때 당시 북한 신의주에서 본 북한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헐벗고 남루했어요. 신발도 없이 다니고. 일부러 그렇게 다니지는 않을거 아니에요. 그만큼 생활수준이 힘들다는 거겠지요. 지금도 생각나는게 북한사람이 그랬어요. 우리가 새마을운동을 할 당시 자기들은 천리마 운동을 했다고.

천리마 운동이 어떤 운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이렇게 부유한 나라가 된 것은 북한하고만 비교해도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새마을지도자 분들은 모두 인생 스승

구미시 새마을 부녀회장과 경상북도 새마을 부녀회장을 하면서 큰 어려움을 없었어요.

주위의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기 때문에. 제가 약사여서 그런지 약국도 경영하면서 부녀회장을 하니 힘들어 보여서 그랬는지.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물론 우리 남편이 가장 많이 도와 주었죠.

그렇게 난 좀 수월하게 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른 지도자분들을 보면 정말 대단한 분들이 많으시더라구요. 다른 새마을지도자분들 성공사례 발표 이런거 들어보면 굉장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걸 다 극복하고 해내시더라구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리고 전 구미에 살잖아요.

산업도시이기도 하니 도로도 잘 발달이 되어 있고, 대구하고도 가까워 경북의 다른 지역하고 많이 달랐어요. 근데 내가 한번 느낀게 울진이라든지 영덕이라든지 뭐 울릉도는 말 할 것도 없고. 근데 거기서 새마을회의를 한다고 하면 그 멀리 있는 회장들이 한번도 결석도 안하고 지각도 안해요. 난 그래서 별로 멀다고 생각을 안했어요.

그러다 한번은 내가 도 부녀회장이 되고 나서 울진이고 영덕이고 이런데를 가보니까 엄청 먼 거리더라구요. 당시에는 길도 안좋았어요.

진짜 나중에 알았죠. 그때 교통환경이 더 안좋았을 때 지각 한번 안하고 회의에 참석하는 회장들의 그 열정이 마음이 전해지더라구요.

난 정말 그때 마음이 저며 옵디다. 그 먼길을 온 사람들에게 왜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하지 못했는지…후회도 되고. 이제는 만나는 사람들을 정말 따뜻하게 안아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해요. 그리고 그걸 가르쳐 준 새마을지도자 분들 모두가 저에게 인생의 스승이죠.

 

▲ 고(故)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앞줄 가운데)가 지역의 여성리더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을 당시 참석한 이화자 전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이희호 여사 왼쪽).
▲ 고(故)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앞줄 가운데)가 지역의 여성리더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을 당시 참석한 이화자 전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이희호 여사 왼쪽).

△ 혼자가 아닌 더불어 잘 살기 운동

새마을부녀회를 관변단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 아니에요. 정말 봉사하는 단체에요.

봉사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이 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요. 새마을운동은 나 하나 잘 살자고 하는 운동이 아니라 우리 이웃 주민들하고 시민들하고 같이 더불어 잘 살자는 운동이잖아요.

그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우리 새마을부녀회입니다. 저는 새마을부녀회 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에서 활동을 했어요. 그런 일들을 해보니 더 느끼는 건 새마을정신인 근면, 자조, 협동 이걸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거에요. 그래야 나눔이라든지, 배려, 봉사도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왜 좀 더 열심히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많이 배우고 똑똑하니 새마을정신을 더 잘 계승·발전 시킬거라 믿어요.

비록 지금은 정치적인 이유로 잘못된 오해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새마을운동은 이 시대의 상징적인 정신으로 더 많이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 곧 새마을테마공원이 완공된다고 들었는데 새마을 지도자였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도 느끼고 기대도 큽니다.

새마을운동 정신이 잘 계승·발전이 되길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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