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⑥
새마을운동가 구술생애사 채록
편창범 전 경북도 새마을봉사과장(下)

▲ UN 아프리카 빈곤 극복 프로젝트에 새마을운동을 접목시키자는 제안에 따라 김관용 지사와 함께 아프리카를 찾았다.
▲ UN 아프리카 빈곤 극복 프로젝트에 새마을운동을 접목시키자는 제안에 따라 김관용 지사와 함께 아프리카를 찾았다.
UN과 손잡고 우간다 등 아프리카 방문
현지에서 새마을운동 직접 전수해줘
`눈으로 볼수 있는 새마을 운동` 절실

△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를 성공리에 마치고

2009년 9월에 구미박정희체육관에서 열렸던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는 성공적으로 잘 끝났어요.

대통령도 와주시고 외국대사들도 정말 많이 와주셨어요. 행사는 정말 거창하게 잘 했는데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외국에서 오신 대사분들 대부분이 이렇게 전시된 것 말고 새마을운동을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 가보고 싶다고 하시는 거에요. 새마을 운동한지 40년이 지났으니 보여 줄 곳이 없는 거예요. 새마을운동을 제대로 재현할 필요성이 그때 나온거예요.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재현해 놓은 곳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지금 젊은 사람들은 우리나라 60~70년대가 얼마나 가난한지 모르잖아요. 본 적이 없으니까.

당시에는 쌀이 없어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겨울 추위를 어떻게 견디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심지어 내 자식도 옛날 밥이 없이 굶고 다닌 이야기를 하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잖아요`라고 하니까…. 우리 세대 모두가 가난만큼은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아야겠다는 그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살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고생스런 시절을 지금의 젊은이들이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세대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젊은 세대들이 안다면 지금과 같은 세대간의 오해는 좀 덜하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많이 드네요.

△ 새마을운동 UN과 손을 잡다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를 마친 뒤 얼마되지 않아 김관용 지사님을 모시고 UN을 갔어요. 2009년도 12월로 기억하고 있어요.

당시 반기문 UN 총장의 수석 자문관인 제프리 삭스 교수(콜럼비아대학)가 아프리카 빈곤 극복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나봐요.

그런데 그쪽에서 먼저 경상북도의 새마을운동을 프로젝트에 접목시키고 싶다는 제안을 한 거에요. 그래서 UN을 방문하게 된거죠. 새마을운동이 가난을 극복한 성공사례라는 것을 이미 알고 도와달라는 거였죠.

그래서 국제원조기구인 코이카와 함께 들어갔어요. 거기서 WTO스텝제단, 경북도, 코이카 등 3개 기관이 돈을 내고 기술이나 현지지도는 UN 산하의 MP(Millennium project)재단이 운영하는 걸로 했죠. 그때 돈을 1년에 경북도가 2억원, WTO스텝제단 2억원, 코이카(KOICA)가 16억원 등 총 2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어요.

MP재단이 운영은 했지만 방식은 우리 경북도가 하라는 방식대로 하기로 했죠. 새마을운동이 세계로 나간 첫번째 사례가 된거에요.

이후에 또 지사님과 함께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방문했어요. 우리 경북도가 금전적 지원을 하고 있는 곳이었거든요. 거기서 우간다 총리와 탄자니아 대통령을 만났어요. 가는 곳마다 비포장 도로라 다니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어요. 거기다 내란이 있는 지역이라 항상 무장을 한 UN군이 우리를 경호해 주고 있었죠. 한번은 첩첩산중 민둥산이 있는 지역에 비가 내려 3시간 동안 꼼짝도 못했던 경우도 있었어요. 도로가 비포장이니 비가 오니까 진흙으로 변한거예요. 비는 금방 그쳤는데 땅이 마를때까지 기다려야 했죠.

또 한번은 탄자니아를 갔는데 가이드가 왼쪽은 하루에 1달러로 살고, 오른쪽은 2달러로 산다고 소개를 했는데, 보니까 동네 자체가 달라요. 1달러의 차이가 엄청난 거에요. 사실 그 나라에는 우리 경북도 말고도 여러 선진국에서 원조를 엄청나게 해주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원조가 잘 배분이 안되는게 문제였죠. 속된 말로 위에서 다 빼먹으니까. 그래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지요.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지사님이 “우리가 새마을운동을 지금처럼 진행하면 코이카에서 하는 국제원조와 다를게 없다. 우리가 직접 가서 새마을운동을 해야하는게 맞을 것 같다. 우리가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전수해 주자”고 강조했어요.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새마을세계화 팀을 만들었어요. 사무관 1명과 직원 3명으로.

 

▲ 2009년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에 참석한 주한 아프리카권역 대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2009년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에 참석한 주한 아프리카권역 대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새마을운동의 세계화

새마을운동을 아프리카에 전수하려면 어떻게 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인지를 찾아야 했어요.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옛 교수님들을 찾아가고 새마을중앙회에도 가고, 코이카에도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와 정보를 많이 수집했어요. 그래서 초기에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도 교육을 시키기로 했죠. 그런데 교육을 받고 돌아가면 그걸로 끝이에요. 서로의 문화가 달라도 너무 다른 걸 몰랐던 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우리들처럼 간절함이 없었기도 했구요.

그래도 여기서 멈출수는 없으니 방법을 바꿨어요. 우리가 그 곳에서 상주하는 걸로. 그 곳에서 우리가 살면서 직접 하는 모습을 그들이 봐야 느끼고 배울거라 생각한거죠. 그런데 사람을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말도 안통하고, 기후풍토가 모두 다른데 잘 버틸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죠. 그래도 사전답사를 통해 직원들하고 팀장을 보내기로 하고 첫해 코이카로부터 25억인가를 지원받았어요. 그 사람들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그래도 성과는 있었죠. 쌀 재배하는 방법도 가르치고 해서 쌀 생산량을 7배나 높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 동네에서 잔치까지 열어주기도 했으니까.

성공적인 새마을운동 보급을 지사님이 직접 UN에 가서 보고도 했어요. 반기문 총장이 새마을운동이 아프리카에서 성공하는 걸 직접 보고는 “당신들(아프리카)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워라. 그것이 국가발전의 최고의 원동력이다”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때부터 에티오피아에서 우리도 새마을운동을 해달라고 요청이 왔어요.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지역의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요청하고, 동남아에서도 요청이 오고 했어요. 점점 규모가 커지니까 경북도가 직접하는게 힘들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새마을세계화 재단이라는 독립된 재단이 만들어 지게 된겁니다.
 

△ 새마을운동의 종주 도시 구미와 경북도

새마을운동이 세계로 뻗어 나가고는 있었지만 문제는 국내에 있었어요. 사실 이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인식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거든요. 정말 웃긴게 새마을운동에 대한 연구논문으로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상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들이에요. 한국인은 없어요. 제가 알기로는. 사실 정말 부끄러운 일이잖아요.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 당시 우리나라를 찾았던 외국대사들이 이렇게 대단한 새마을운동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곳이 없는게 더 이상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새마을테마파크 조성사업이 시작된 거에요.

이 사업은 처음부터 힘들었어요. 정부도 이 사업의 필요성을 잘 몰랐으니까. 그냥 새마을운동을 하면되지 이게 왜 필요한가라고 오히려 되물어 볼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새마을을 담당할 수 있는 중앙부처가 없어요. 그래서 외교부, 총리실, 행자부. 코이카 등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뛰어 다녔어요.

그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죽도록 뛰어다니니까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더라구요. 사실 중앙부처 사람들도 우리들 때문에 지쳤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정도 사업이 구체화되고 예산이 세워지니까 갑자기 성남시에서 자기들이 새마을테마공원을 했으면 한다고 나서는 거예요. 새마을중앙회가 있다는 이유로. 또 서울에서 가까우니 찾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면서요. 그래도 새마을운동에 대한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구미시이고, 그 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곳 또한 구미시와 경북도이니까, 구미에 새마을테마공원을 건립해야한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구미로 최종 결정이 된거에요. 지금은 새마을테마공원을 가지고 또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한마디는 꼭 하고 싶어요. 새마을운동에 대해 말로 해서는 지금의 세대들이 절대 알 수가 없죠. 그 당시에 새마을운동이 왜 필요했으며, 새마을운동이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정신운동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그 정신운동이 세계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려야 합니다. 새마을테마공원이 바로 그런 공간이 될 것이고, 그 역할을 하리라 믿습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관련기사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