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①
새마을운동가 구술생애사 채록
신재학 現 경북도새마을회장 (上)

▲ 신재학 경상북도새마을회장이 의사복을 입고 새마을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근대사에서 한국은 산업화의 3대 요소인 자본, 기술, 자원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던 세계 최빈국이었다. 그러던 한국이 농업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세계적인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 새마을운동이 견인차 역할을 해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러한 새마을운동이 지금은 관 주도로 태동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정치적 시비는 한 두번 겪는 시련도 아니다. 짧은 시기에 엄청난 효율성을 올렸음에도 정치적 이유로 온갖 수모를 겪는 새마을운동이지만, 그럴때마다 새마을운동 회원들은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새마을정신을 바탕으로 묵묵히 본연의 자리를 지켜왔다.

새마을운동은 `모두 함께 잘 살자`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국민 모두가 참여했던 대국민운동이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도 2004년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새마을운동은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은 자랑스런 역사”라고 했다.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일에 자신들의 삶의 일부를 바친 우리 지역의 새마을운동가들을 만나봤다.

이들이 이웃들을 위해 흘린 작은 땀방울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음을 기억한다.

전문의 216번, 경북 최초 전문의
김관용 당시 구미시장과의 인연으로
2003년 구미시새마을회장 처음 맡아

1947년 11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신재학(69) 회장. 그는 성주군에서 말단 서기를 지내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육남매 중 장남이었다.

성주 초전국민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 공직을 그만두고 부산에서 장사를 하는 아버지를 따라 부산 성남국민학교로 전학을 가서 그곳에서 졸업했다. 부산 계성중학교를 거쳐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1979년 국립의료원 신경외과를 수료하고, 같은 해 신경외과 전문의 의학박사를 취득했다.

1989년 구미에 고려병원(현 강동병원)을 설립했으며, 2000년 직장·공장 새마을운동 구미시지도자, 김천지방법원 조정위원, 김천검찰청 범죄예방 부회장 겸 의료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6년간 구미시 새마을회장을 역임했으며, 2015년부터 현재까지 경북도 새마을회장을 맡고 있다. 2002년 경북도지사 표창, 2007년 새마을훈장 근면장, 2014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 “공부 안 한다고 아버지한테 많이 맞았지”

어릴적에 대해 이야기할 건 별로 없어요. 6남매 중 내가 장남이었는데 아버지가 매우 엄하셔서 많이 맞은 기억밖에 없어요…하하.

아버지는 성주군 말단 서기로 계셨었는데 자신이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해내는 집념이 강한 분이셨어요. 그런 분이 장남인 내가 공부를 잘 하길 바라는 마음이 오죽하셨겠어요. 공부안하고 놀다가 많이 맞았죠.

어릴적엔 딱히 무엇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한번은 중학교 2학년 때인가, 내가 수학문제가 어려워 아버지께 물어 본 적이 있어요. 아버지는 국민학교밖에 안나오셨거든. 그래서 솔직히 못 풀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단번에 문제를 푸시는거야. 그러면서 나에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시는 거에요. 정말 놀랐어요. 그때 생각했지. “아버지가 정말 똑똑한 분이시구나”라고. 나중에 알았는데 아버지가 고시를 준비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전쟁으로 시험도 못 보셨다고… 그래서 공부에 있어서는 더 엄격하셨던 것 같아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맞기 싫어서 공부했어요. 솔직히 정말 그랬어요. 그런 아버지 덕분에 지금은 의사가 되서 이렇게 병원장까지 하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죠.

△ 한국의 슈바이처가 되고 싶어 도시가 아닌 고향 인근에 병원 개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대에 진학해 전문의 자격증까지 따고보니, 이제는 고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당시 대부분 전문의를 따면 대도시로 가는게 보통이었는데, 난 생각이 좀 달랐어요. 나름의 꿈이 있었거든. 어릴적에도 없던 꿈이 생긴거지.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돈보다는 의술을 펼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국의 슈바이처가 되는게 내 꿈이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요. 처음 병원을 차리려고 보니 당시 성주는 너무 작은 곳이었어요. 그래서 고향과 가까운 김천에 처음 개인병원을 차렸죠. 그때가 1982년 5월이었어요.

당시 뇌수술 같은 큰 수술을 할 수있는 의사가 지역에는 없었어요. 내가 신경외과 전문의인데 경북에서는 최초의 전문의 일거에요. 내가 전문의 216번이었으니까. 그러다보니 환자가 많았어요. 한달에 뇌수술만 20번 정도 했으니까.

관절수술 같은 것은 수도없이 많았고. 한 7년동안 김천에서 병원을 운영했는데 너무 다양한 환자가 찾아오니 도저히 혼자 할 수가 없었어요.

좀 더 큰 병원을 만들어 지역에 더 많은 의료혜택을 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 구미에 종합병원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죠. 사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어요.

그래도 마음을 먹은 이상 실천했죠. 1989년 3월 고려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신경외과 전문병원을 개원했어요. 고려병원을 개원하면서 새마을운동과의 인연도 시작됐어요.
 

▲ 2007년 고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훈장. 신재학 회장은 대통령이 준 훈장이기에 소중하지만, 이 훈장은 새마을운동이 정치적 이념과 상관이 없다는 증표같아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 2007년 고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훈장. 신재학 회장은 대통령이 준 훈장이기에 소중하지만, 이 훈장은 새마을운동이 정치적 이념과 상관이 없다는 증표같아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 새마을운동에 참여하는 건 당연한 것

1989년 3월 고려병원을 개원하고 그 이듬해인 1990년에 직장새마을협의회에 가입했어요.

새마을운동이 잘 되려면 개인적인 새마을운동도 중요하지만, 직장새마을협운동이 더 잘되어야한다는 생각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우리병원도 직장새마을회에 가입하면서 효율적인 병원운영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어느날 당시 김관용 구미시장으로부터 하나의 제안을 받았어요.

구미시 새마을회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죠. 당시 선뜻 하겠다고 대답하지 못했어요. 병원일이 바쁘기도 했고,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그래서 하루정도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하곤 집에 가서 집사람에게 이야기했죠.

그런데 집사람이 하는 말이 “당연히 해야하는 거 아니에요. 하세요”라고 하는거예요. 집사람 말 한마디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다음날 구미시새마을회장을 하겠다고 했어요.

구미시 새마을회장을 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회장을 맡지 않으려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도 그럴것이 자기돈을 쓰면서 회장을 하려는 사람이 없었던 거죠.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데 새마을운동은 다른 단체와 달라서 임원들이 돈을 받고 일을 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돈을 내고 일을 해야하는 곳이거든. 옛날에는 새마을지도자 정도 되면 기차도 공짜로 타고 하는 그런 혜택이 있었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게 하나도 없어요. 새마을회장, 협의회장, 부녀회장, 직장회장 등 모두 자비로 분담금을 내고 일을 해야하니 하려는 사람이 많이 없는 것 같아. 그래도 아직 신념을 가지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그때 2003년부터 6년동안 구미시 새마을회장을 맡았죠.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어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봐도 집사람 말이 백번 옳았어요.

△ 가난했던 내 나라 도움받은 것, 되돌려주고파

김관용 시장의 권유로 구미시 새마을회장직을 맡아 일을 시작해보니 정말 일이 많더라고요. 구미가 새마을운동의 종주도시이기도 하니 진행되는 사업들이 많았어요. 일을 하면서 시장님도 정말 많이 만났어요. 시장님이 새마을운동에 참 열정이 많으셨거든.

그러다 나중에 공무원한테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시장님이 병원을 운영하는 사람이 새마을운동을 하는 것이 낫지않겠냐면서 고려병원장을 한번 찾아가보라고 지시했다는 거에요.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 있지 않아 시장님께 한번 물어봤어요. 그냥 궁금해서…내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는가 싶어서 말이죠.

그랬더니 시장님이 “새마을운동을 새마을정신을 세계에 전파시키고 싶다”고 하셨어요. 어려운 나라에 도움을 주자면서. 우리가 못살던 시절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돌려주어야 되지 않겠냐고. 그러면서 이북에도 새마을정신을 전파하자고 하시더라구요.

새마을정신으로 잘 살 수 있었던 방법을 여러 나라에 가르쳐 주고 다함께 잘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말에 두말 않고 동참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새마을세계화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하지만 당시엔 이북에 가는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어요. 가려고하면 갈 수도 있었겠지만, 솔직히 그땐 너무 두려워 가지 못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새마을이란 이름으로 이북에 갈 수 있는 날이 오겠죠.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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