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유교문화를 바탕에 깔고 500여 년을 유지해온 조선조 사회에서 군자와 소인이란 말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말도 없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는 제자들에게 군자와 소인의 분류를 명쾌하게 정리했다. 그는 `논어 자로편`에 `군자는 남과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지만, 소인은 남과 부화뇌동하기만 할 뿐 화합할 줄 모른다`고 정리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가르치면서 상반된 인간유형으로 군자와 소인을 대비시키고 군자의 삶을 지향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조선후기 문신 이응신(1817~1887)은 `소산문집초고` `유속을 징계한다`라는 논고에서 소인과 유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국가를 다스림에 없애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소인배와 유속이다. 이들은 임금과 굳게 결탁하고 패거리를 널리 심으며 참혹하게 남을 해치고 교묘하게 자기를 살찌운다. 독사와 맹수같이 마음먹고 사귀와 요부 같이 행동한다. 틈을 비집고 들어와 때가 되면 국가에 해악을 끼친다. 음흉하고 사악하고 감추고 속이는 것이 비할 데가 없다. 이것이 소인의 환난이다.`

또한 유속은 `옳고 그름의 중간에 몸을 두고 맑고 더러움의 중간에 발을 붙이며, 패션이나 취미는 남들을 따라하고 말과 행동은 시세와 부합해서 한다. (중략) 온화한 모습으로 공손하며 환히 아는 듯 두루 통해서 비방하는 소리가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재물의 이득을 얻으려는 욕심과 진출해서 빼앗으려는 속셈으로 밤낮으로 일을 꾸며내는 버릇이 몸에 단단히 붙어 풀리지 않는다. 심술이 망가지고 풍속이 전염되어 혼탁하고 비루해 더불어 일할 수 없다.`

또한 그는 유속의 폐해를 네 가지로 정리했는데 `국가를 다스리는 데 유속을 고치지 않는다면 정색하고 참언하는 신하가 없고, 영토를 방어하고 환난을 막아내는 관리가 변경에 없으며, 착실히 공부하고 힘써 실천하는 선비가 학교에 없을 것이며, 윗사람을 친히 하고 장자(長者)를 위해 죽는 백성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유속의 해로움은 물론 소인과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소인보다 심한 점도 있다. 소인은 화(火)라서 박멸할 수 있으나 유속은 수(水)라서 빠져들지 않는 사람이 없다. 소인은 구부러진 나무 같으나 유속은 누런 띠 풀이나 하얀 갈대 같아서 땅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이다.

이응신이 살았던 조선후기는 전형적인 전통시대를 벗어나 아예 군자나 소인의 차원을 떠나 버린 새로운 인간형으로 유속이 대두하였다. 유속은 겉으로 정치에 관심이 없고 도덕에 관심이 없다. 관료적인 처세술과 세속적인 쾌락으로만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당시 유속이 확산되어 더 이상 군자와 소인의 전통적인 인간 유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이응신의 문제 제기가 과연 사실이라면 조선후기의 이와 같은 현상에 어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부패사회의 흥미로운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지금의 우리사회는 진정한 민주정치가 침체되고 좌우 이념프레임에 묶인 패거리정당정치의 장기적인 그림자 속에서 형성된 퇴영적이고 무기력한 정치문화는 결국 현대판 유속의 폐해가 현실화된 것이라 보겠다.

`여씨춘추 신행론`에 옥을 깎는 사람이 근심하는 바는 옥처럼 보이는 돌이고, 검을 만드는 사람이 근심하는 바는 오나라 간장검처럼 보이는 검이고, 현명한 군주가 근심하는 바는 사람들이 널리 많이 듣고 논쟁하여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망국의 군주가 지혜로운 자와 비슷해 보이고, 망국의 간신들이 충신과 비슷해 보인다. 때문에 외형이 그럴싸하게 비슷한 것의 자취를 깊이 살피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듯 서로 비슷한 참과 거짓의 올바른 살핌은 오직 현명한 국민들의 몫인 것이다.